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한국 광복군 예비대(韓國光復軍豫備隊, 1945년 9~11월(추정) ~ 1947년(추정) === [[파일:광복군예비대 금고발견.png]] 1972년 1월 13일, 서울시청 본관 4층 복도 북쪽의 12호 창고내 벽에 위치한 한 금고는 일제시대에 설치된 이후 열쇠가 없어 잠겨둔 채 방치되어 있었다. 이 금고는 1971년 12월부터 개시된 청내 창고에 대한 일제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개방이 결정되었으며 금고의 크기는 가로 2m, 세로 1m, 높이 2.2m였다.[[https://www.mk.co.kr/news/economy/160893?fbclid=IwAR15mf0Eb5th2yfFSazHTG8Op5I-l7W-_ppZ8I5LmmQOqv7xEaWCdtMDLEo|관련기사]] >[[파일:00500883_20180304.jpg]] >우리가 알고 있는 광복군 군복은 광복 이후 국내 일본 학도병 군복을 이용해서 만든 것이다. [[https://archives.seoul.go.kr/item/5798#none|발견 당시 기록사진]][* 서울기록원 소장] 1월 12일 서울시 당국은 금고제조 전문기술자에 의뢰하여 오후 4시부터 개문 작업을 시작, 13일 오전 10시 반 문을 용접기로 절단하는데 성공하였다. 금고 안에는 서류, 책자 등과 함께 폭발성 물질이 담긴 것으로 보이는 깡통 등이 발견되어 경찰관 및 관계자들을 입회 시킨 후 물품 정리를 계속하였으나 혹시 사고가 날 것을 우려하여 일단 봉인한 후 같은 날 밤 11시 반부터 작업을 속행하여 14일 새벽 4시까지 물품 정리를 완료하였다. 서울시는 발견 물품의 목록을 정리하여 문화공보부[* 현재의 문화체육관광부]에 조사를 의뢰하였으며 문화재 관계관들을 통한 면밀한 조사가 이루어 진 후 발견 물품들은 문화공보부 및 군 기관에 이관되었다. >발견된주요물건 >▲대한민국 개선·환영대회 약도 >▲각 정당 단체 해설 1권(45년 여론사출판)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18|김구]] 선생 친필 족자 1개 >▲임시정부 환국·환영대회 계획서 1장 >▲군무부장 김원봉 보고서 >▲수표책 2권 (조선식산은행 1945년 12월) >▲대한 국군 준비 총사령부 공고문(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주석 김구) >▲우리 정부 27년 약사1권 >▲신 조선보(신문 2장)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269|리청천]](백산)광복군총사령이 김승학씨에게보내는 명함메모 >▲한국 광복군 개성원호회의 경리관계서류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용(책 1권) >▲김윤식씨 서류 8장 >▲한국 광복 예비군대 발행 증명서 및 금전 출납부 >▲북경 사진첩 >▲소화(昭和) 7년(=1932년) 경성 지도 37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예비대 사령장 5장 >▲광복군 제 2지대 편성관계문건 >▲군복 상의 2,하의 1개 >▲전투모 5개, 정모 1개 >▲인물사진 57장 >▲조선은행권 2천7백4원·만주은행권 81원 >▲일본은행권 6만5천9백76원5전 1945년 12월 16일 조선일보 광복군 예비대 이전에 대하여 보도된 적이 있다. [[파일:광복군예비대 이전.png]] >광복군 예비대 본부 이전 >7년 전(1938년)에 임시정부 특명을 받고 입국한 유진식씨를 중심으로 사방 동지를 규합하여 광복군 정신으로 편의대를 조직하여 왜적의 가혹한 법망 속에서 지하공작을 계속하여 오다가 1945년 8월 15일 이강차 체계를 한층 강화하여 건전한 지상운동으로써 국가의 가장 견실한 간성 인재를 양성, 9월 6일 대전시에서 한국 광복군 예비대 훈련소를 설치하는 동시에 절대후원기관인 본 협찬회도 조직된 것으로 금반 임시정부 환국을 일으켜서 예비대 본부는 서울 역전으로 협회는 서울시 고시정 19번지로 각각 이전하고 가장 질서정연히 오직 국방공작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중인데 그 부서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 >고문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036|조성환]] 회장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5386|조소앙]] 부회장 >서창휘 간사장 >임지수 총무부장 >한인구 재무부장 >림지수 사업부장 >홍종오 선전부장 >이재호 실천부장 >조두환 외사부장 >이범용 조사부장 >정길수 참의원 >의장 정재하 >부의장 이종영 >참의 서창준, 이상준, 이병기, 송태식, 권태훈 한국광복군 제2지대 대원이었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020|장준하]](張俊河)는 >1945년 11월 23일에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303|오광선]](吳光鮮)이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18|김구]](金九)의 지시에 따라 귀국하여 국내지대를 만들었고 대원들은 모두 국내 청년이었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광복군 국내지대, 기타 국군준비대 등 각종 단체들이 많았는데, 광복군예비대는 김구(金九)와 가깝게 지내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08|김승학]](金承學)를 배경으로 하여 조직된 것 같으며 당시 국내지대 요원은 100명 정도로 환국한 임정요인들의 경호역할을 맡았다. 고 언급하였다. 광복군예비대의 창설과 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김용훈(金容勳), 김여산(金如山)의 증언이다. 당시의 보도 기사 간 증언 내용이 다소 차이가 있어 각각을 분리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파일:예비대부사령관 김용훈씨.png]] '''김용훈(金容勳, 1972년 당시 그의 나이 64세) 증언''' 『동아일보』에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시헌, “치안단체 서류 보관 해뒀다”, 『동아일보』(1972년 1월 15일);“시청 금고서 발견된 서류 국내 광복군 별동대의 것”] >광복군예비대는 1945년 9월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5663|유진식]]의 주동으로 대전에서 창설, 공식 명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예비대'''였다. 유진식은 일제강점기 조선 총독 암살[* 당시 다수의 언론기사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이라고 서술하고 있으나 유진만(유진식)이 암살을 기도한 조선 총독은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이다.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 대한 암살 사건은 1911년 일제가 항일세력에 대한 통제를 목적으로 조선총독 암살사건을 조작, 105명의 애국지사를 투옥한 사건으로 ‘105인 사건’으로도 불린다.] 등의 활동을 했던 김구(金九) 휘하의 한인애국단 동지회원이었으며 광복군예비대 창설 당시 총사령은 김형동이었다. 이 광복군예비대는 창설 후 두 달 뒤 서울로 옮겨 후암동 병무청 자리[* 현재 서울 브라운스톤 남산아파트 자리]를 본부로 사용하다가 다시 남대문 경찰서 부근으로 위치를 옮겨 임시정부 환국 환영 준비와 국내 치안유지를 위해 힘썼다. 『조선일보』에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복군 예비군 창설멤버로 부사령을 역임한 것으로 소개되었다.][* 金英鎔, “光復軍 國內支隊것”, 『조선일보』(1972년 1월 15일)] >당시 서울의 치안 확보를 위해 서울시청에 (광복군예비대의) 파견대가 주둔, 별관 일부와 본관 2층 회의실을 사용하였는데 1947년 광복군예비대 협찬회에서 횡령사건이 일어나 관계 서류를 압수 시청파견대에 보관시킨 것이 금고 안에서 발견된 서류들인 것 같다. 고 증언하였다. 『경향신문』에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光復軍文書 등 발견”, 『경향신문』(1972년 1월 14일).] >금고 안에서 발견된 물건들은 광복군예비대 파견대와 광복군(예비대)협찬회에서 맡긴 물건들로 1947년 1월 광복군예비대협찬회에서 문제가 생겨 협찬금 관계 서류를 서울시청 파견대에 가져다 보관시켰는데, 당시 보관책임자인 송재흥(宋在興)으로부터 서울시에서 가장 안전한 금고에 보관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 >광복군예비대는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5663|유진식]](일명 유진만)을 중심으로 김용훈(金容勳)과 권오훈(權五勳), 한강현(韓康鉉) 등이 1945년 9월 1일 '''귀국하지 않은 광복군과 임정요인들의 환국 준비''' 등을 위해 대전에서 결성되었다. 광복군예비대 창설의 주역인 유진식은 윤봉길(尹奉吉), 이봉창(李奉昌)등 의사 등을 낸 한국애국단 회원으로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1932년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는 유진만 등 한인애국단원을 파견하여 우가키를 암살하려 했다.]을 암살하려다 무기형을 선고 받고 대전 형무소에서 복역 중 해방과 더불어 출감한 독립투사였으며 유진식이 창설한 공식명은 '''재중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예비대(在中大韓民國臨時政府 光復軍豫備隊)'''였다. > >광복군예비대는 1945년 11월 대전에서 서울 용산구 후암동 당시 병무청사로 임시본부를 옮겼으며 예비대를 위한 협찬회가 결성되었다. 그 후 1946년 5월 본부를 다시 서울역 앞 남대문서 자리에 있던 일신빌딩으로 옮겼고 지방조직 확대와 김구金九 주석 등 상하이(上海) 임정요인 환국준비에 앞장섰다. > >광복군예비대의 대원 숫자는 8,500명 가량으로 총사령은 중국바오딩군관학교 출신 김형동이었고 부사령은 김용훈(金容勳) 본인이 맡았다. 그러던 중 좌·우익 세력이 서로 충돌, 서울의 치안이 불안해지자 예비대는 시청 2층 회의실을 빌어 사용했으며 이 장소에 광복군예비대의 관계 문건과 예비대협찬회의 장부 등을 보관하였다. 고 한다. '''김여산(金如山, 1972년 당시 58세)의 증언''' 『동아일보』에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시헌, “치안단체 서류 보관 해뒀다”, 『동아일보』(1972년 1월 15일);“시청 금고서 발견된 서류 국내 광복군 별동대의 것”] >광복군예비대는 전위대에서 3개 중대 규모로 1946년 2월 서울시 창신동 강문중학교 자리에 본부를 두고 발족되었다. 당시 서울운동장에서 신탁통치 환영대회가 열리려 하자 이를 분산시키기 위해 총격전까지 벌어지고 관련 인물들이 체포, 투옥되었는데, 그때 예비대에서 쓰던 비품과 문서들이 압수되어 서울시청으로 옮겨 졌을지도 모른다고 김여산(金如山)은 증언하였다. 또한 금고에서 발견된 토지대장, 헌금 문서 등은 일제시대 자작(子爵)을 지낸 이예한(李豊漢, 1885~1950)등이 기증한 것 같다고 언급하였다. 『조선일보』에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고 안의 물품들은 1945년 9월~1946년 2월까지 서울에 있었던 광복군 국내지대(國內支隊)인 광복군예비대의 것으로, 김여산(金如山) 본인은 1945년 9월 만주 허투알라(興京)에서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李靑天)의 명에 따라 ‘대한건국군 전위대사령부 부사령’이란 비밀 직책을 받고 귀국하여 서울 창신동 현 용문중학교 자리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건국군 창설활동을 벌였다. 당시 존 하지(John Reed Hodge, 1893~1963)가 사령관으로 있었던 미군정이 국방경비대 창설을 반대하는 자신을 투옥하였고 1948년 출소해 보니(실제는 1947년 7월 출소) 사령부에 있던 서류·장비·재산 일체가 없어졌으며, 어떻게 서울 시청 금고 안에 보관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광복군예비대의 대원수는 1972년 서울시청 금고 개방 당시 김용훈(金容勳)의 증언에 따르면 8,500명 가량이었다고 한다. 다만, 오광선(吳光鮮)휘하의 광복군 국내지대의 요원이 100명 정도였다는 장준하(張俊河)의 증언과 환국한 임시정부 요원들의 경비를 담당한 광복군예비대의 규모가 약 100명이었다는 언론보도 등을 고려하면 이는 과장된 숫자로 보인다. 광복군예비대는 광복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을 지지하는 세력으로서 해방정국기에 국내에 창설, 운영된 군사조직이다. 광복군 예비대는 1972년 서울시청 12호 창 고내 금고에서 관련 유물이 대거 발견됨으로써 그 실체가 공개되었으며 이 때의 발견 자료 중 일부가 군기관으로 이관되어 현재까지 육군박물관에 소장되어 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과의 연관성''' 중국에서의 한국광복군 활동에 직접 참여한 이범석, 장준하 등의언급으로 볼 때 광복군예비대의 설립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는 중국의 한국광복군 지휘부 등으로부터 직접적인 지시로 이루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국내의 창설된 공식적 성격을 지니는 광복군 지부는 오광선(吳光鮮)을 지대장으로 하는 광복군 국내지대였다.[* 위 문서, 한국광복군 확군, 잠편지대 편성표 참조.] 다만, 육군박물관 등 현재 기관 소장품 중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당시 서울시청에서 발견되어 신문기사에 언급된 광복군예비대 관련자료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 국내지대와 관련한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임시정부환국 환영대회 관련 문건, 군무부장 김원봉 보고서: 김구 임시정부 주석으로 보내는 광복군 국내 제 2지대 설치에 관한 공문, 제2지대[* 중국 시안(西安)에 본부를 두었던 한국광복군 제2지대인지, 혹은 광복군 국내지대의 제2지대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국내 제2지대 관련 자료 및 국내 제 2지대장이었던 김승학(金承學)에게 이청천(李靑天)이 보낸 명함메모 등이 함께 발견된 점을 고려했을 때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편성 관계 문건, 김구 명의의 대한국군 준비 총사령부 공고문,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이 광복군 국내지대 사령부의 고문 및 국내 광복군 제2지대장 역임한 김승학(金承學)에게 보내는 명함메모, 한국광복군 개성 원호회의 경리관계 서류철이 그것으로, 광복군예비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광복군 국내지대의 설치, 편성과 관련하여 일정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있다.[* 장준하는 광복군예비대가 김승학을 배경으로 조직된 것 같다고 증언한 바 있다, 앞의 기사, 『동아일보』(1972년 1월 15일)] 또한 당시 임시정부가 해방 후 국내에 들어갈 광복군의 조직과 세력을 확대하고자 적극적인 확군활동(擴軍活動)을 펼쳤다는 점, 광복군예비대 주요 간부에 독립군·광복군 활동을 직접 수행했던 인물들이 포함된 점, 광복군예비대가 임시정부의 주요 요인이 머물렀던 장소를 경비했다는 사실 등을 고려하면 국내 임시정부 지지 세력을 중심으로 결성된 광복군 예비대가 임시정부 및 광복군 국내지대와 교류 혹은 그 이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앞서 언급한 자료들은 현재 실물로서 확인되지는 않으므로 추가적인 자료 발굴과 확인이 필요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