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루머 "박정희 비밀광복군설" === 박정희 비밀광복군설은 일제말기 박정희가 독립군인 광복군의 일원으로 비밀공작원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실은 앞서 말했던 광복군의 확군(擴軍) 과정 즉, 일제가 패망 후에 만주군, 일본군 소속 한국인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해방 후 광복군'에 잠시 있었을 뿐이었다. [* 국가보훈부 공적심사 기관에서도 1945년 8월 15일 이후 입대한 한적사병 출신 광복군의 공적인정을 하지 않고 있다. 학병출신은 최소 1년 정도 복무할 것을 잡고 있다. 광복 이후에 그만큼 광복군을 사칭하고 다니는 한국인들이 많았는데다 이런 사람들에게 물으면 어느 부분에서 들통이 나기 때문이다. 많게는 200명에서 40명의 분대, 구대로 나뉘어져 있는데, 서로서로 모를 것 같은가?] 이 비밀광복군설의 근거는 196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광복군 출신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57|박영만]]이 출판한 '소설' 광복군에서 출발한다. >[[파일:소설 광복군.jpg ]] >박영만, 소설 광복군, 협동출판사, 1967 상.하 2권짜리 책으로 상권은 광복군 3지대장이자 확군(擴軍)과정에서 총사령부 주상해판사처장을 맡았던 백파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338|김학규]] 장군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고, 하권은 박정희[* 심지어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인정에도 없다.]가 주인공이다. 이 책이 박정희가 광복군의 비밀요원이었다는 잘못된 내용을 담아 보수 일각에서 박정희의 친일논란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당시 정황을 비교적 잘 아는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58|김승곤]]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소설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 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 고 증언한다. 박정희를 비밀 광복군으로 묘사한 책은 더 있다. 박정희 정권에서 합참의장, 국회의원을 지낸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8829|장창국]][* 장창국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제59기) 출신이고 박정희도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 57기) 입학생, 1946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한다.]은 1984년 출간한 ‘육사 졸업생’에서 박정희가 비밀 광복군에 가담한 경위를 이렇게 기록하는데, 광복군 출신 박영만의 논 픽션의 소설 광복군이 계속 와전되면서 진실로 믿어버리게 된다. >[[파일:장창국 육사.png ]] >장창국, 육사졸업생, 중앙일보사, 1984. >“신태양악극단이 1945년 2월9일 (만주군) 7연대에 들어가 공연을 했다. 광복군은 이 악극단에 잡역부를 가장한 공작원 이용기를 투입했다. 이씨는 부대 간부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박정희 중위, 신현준 대위와 만나는 데 성공했다. 이씨는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의 직인이 찍힌 광복군 임명장을 박 중위와 신 대위에게 줬다. 이래서 그들은 광복군 비밀요원이 됐다.”[* 장창국, 육사졸업생, 중앙일보사, 1984. p. 26] [[파일:박정희 만주일보.jpg]] 물론 1942년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하며.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을 했고 수석 졸업생으로 '''"대동아 공영권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라고 선서하며 일본에 충성을 맹세한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박정희 자신도 광복군을 부인하고 만주국군 동료들도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5·16 쿠데타 동지인 [[박창암]] 전 혁명검찰부장도 박 전 대통령의 비밀광복군설을 부인하는 증언을 한 것이 정운현이 쓴 <실록 군인 박정희>에 나온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당시 1945년 7월 중위로 진급한다. 1945년 8월 보병 8단 예하 각 부대는 둬룬(多倫)으로 진출해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8월 10일에 출발하여 17일 집결했으나 일본이 패망 소식을 접하고, 8단의 중국인 군인들에 의해 신현준 등과 함께 직위에서 해임되고 무장해제당했다. 1945년 9월 팔로군의 지휘를 받는 6단과 함께 미윤으로 이동한 후, 9월 21일 도망치기 위해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신현준, 이주일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일본군과 만주군에 소속되어 있던 장교 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가 지휘하는 제1대대(평진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였으나 '''광복 이후에 편입이 된 것이기 때문에 독립운동과는 무관하다.''' 1946년 4월 평진대(제1대대)가 해산한 후, 1946년 5월 8일 미군정의 방침에 의해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 만주는 소련군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팔로군에 있던 연안파 조선의용군은 육로 귀국할 수 있었고 나머지 자유진영에 속한 지역은 광복군과 함께 배를 타고 국내로 귀환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