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의미 ===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한 다음 해인 1941년 11월에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1300&code=kc_age_40|대한민국 건국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을 발표하여 >“자력(自力)으로 이민족의 전제를 전복한다” 라는 자주 독립 노선을 내외에 천명하고 조국 광복 실천의 3단계를 제시하였다. >1기 대적혈전기(對敵血戰期) >2기 국토의 일부를 회복하여 임시정부가 국내로 이전한 시기 >3기 국토를 완전 탈환하여 복국(復國)을 완성하는 시기가 그것이다. 강령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이 실현되어야만 했던 것인데, 실현 직전에 일본이 항복하고 말았기 때문에 전후(前後)의 한국 독립 문제에 대하여 임시정부의 발언권이 없어지고 만 것이다. 임시정부는 일본이 항복하자 '''국내정진군 선발대[* 이범석 장군과 김준엽, 장준하, 노능서로 미 전략사무국(OSS) 명령에 정진대 인원을 줄여서 여의도로 일본 항복문서를 받으러 간 작전이었다.]'''을 1945년 8월 16일 출발시켜 1945년 8월 18일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국내정진군은 일본군의 저지를 받아 1945년 8월 19일 중국 산둥성으로 귀환했다.[* 관련하여 장준하, 돌베개 - 장준하의 항일대장정, 돌베개, 2015. 김준엽, 장정 : 나의 광복군 시절,아연출판부, 2023(개정판)을 보시면 된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광복군은 중국 지역에서 일본군으로 끌려나왔던 한국 청년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면서 확군(擴軍) 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학병뿐만 아니라 위안부 여성들도 같이 편입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미군정]][*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 在朝鮮美國陸軍司令部軍政廳) 1945년 9월 9일 ~ 1948년 8월 15일을 줄여서 미군정 시기라고 한다. ]당국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광복군에 대해서도 무장 해제를 요구하였다. 때문에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 할 수밖에 없었고, 광복군도 무장을 해제한 상태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으며, 1946년 5월 16일 공식 해체되었다. 귀국한 광복군의 일부는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