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여론반발 그리고 숙군(肅軍)[* 김구파 광복군을 숙청한 걸 말한다.] ==== 미군정은 1946년 말 통위부장[* 미군정기 국방장관]과 경비대사령관을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184|유동렬]][* 광복군 참모총장, 6·25당시 북한에 납치 도중, 1950년 10월 18일 평북 희천의 어느 농가에서 숨을 거두었다]과 [[송호성(군인)|송호성]][* 광복군 훈련처장, 제 5지대장, 6·25당시 서울에 잔류하다 납북된다.] 등 독립군 출신으로 교체했다. 독립군을 우대한 것이 아니라 여론 때문이었다. >"이게 일본군이지 대한민국 군대인가!" 제1연대에선 >“이 따위 경비대 해산시켜라. 빨갱이[* 소련군] 노랭이[* 미군] 같은 놈 몰아내라”[* 미소공동위원회 1945 ~ 1947로 미군과 소련군이 신탁통치하고 있던 시기이다.] 며 소요사태가 벌어졌다. 놀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502|이응준]]은 미군정에 수뇌부를 광복군 출신으로 임명하자고 제안했다. [[파일:송호 중좌 취임 46_12_18.png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184|유동열]]·[[송호성(군인)|송호성]] 체제는 서둘러 독립군 출신을 특임 장교 형태로 충원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경비대의 뼈대는 이미 일본·만주군 출신 장교들이었다. 비록 초대 국방장관이 광복군 제 2지대장 이범석이었지만 그는 김구, 김원봉와 각을 세우고 있었다. 문제는 광복군 출신은 대부분 김구 계열이었다. 그는 초대 총참모장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502|이응준]], 육군사령관에 [[이형근]]을 앉혔다. 이들에게 김구 계열의 광복군 출신들은 눈엣가시였다. 광복군 출신들은 친일파 청산을 물고 늘어졌다. 국방경비대 내의 이승만 권력을 업은 이범석 장군의 숙청작업, 일면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502800&code=kc_age_50|숙군(肅軍)사업]][* 부분별한 '''양민학살'''도 자행했지만, 육군내에 '''즉결처분'''[* 백선엽 동생 백인엽 장군]이라는 명목으로 이유없이 부하를 죽이거나 군인으로서 불명예한 상관을 죽이는 '''상관살해'''[* 1955년 특무대장 김창룡의 암살]가 벌어진다.]을 하게 된다. 백선엽, 특무대장 김창룡같은 사람들이 일선에서 지휘하게 되고 이범석 장군도 이승만 대통령[* 이범석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파커 만년필을 선물 받을 정도로 각별했다고 한다.]에게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하여 송호성을 견제하면서 제주 4.3 진압과 여수-순천 사건의 총책임자였다. 이 기간동안 이범석 장군은 국방경비대 내에 있는 김원봉계, 김구계 광복군 출신들을 숙청해서 정권을 잡고 싶었던 것이고 이승만 대통령은 이범석 장군과 [[송호성(군인)|송호성]] 장군을 서로 견제하게 하여 친일파를 기용하여 본인의 권력을 유지시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시정부와 한독당 출신 인사들은 북한간첩단 사건으로 특무부대장 김창룡에 의하여 누명 씌워지거나 함정수사에 체포되어 구금되거나 사형판결을 받은 사람이 많았고 광복군 출신은 군대나 정치판에 뛰어들지 않은 사람들이 겨우 살아남았다. 광복군으로 활동하였던 독립운동가들의 자서전이나 수기가 뒤늦게 나온 것도 군부정권때까지만 해도 내가 독립운동했다는 사실을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왜냐면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책을 내면 내용에 대하여 사상검증하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 4.3사건과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 事件)의 경우 당시 국방장관을 맡은 철기 이범석 장군, 조병옥 경무국장 미군정 모두 책임이 있다보니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 명예회복이 쉽지 않은 상태이다. 자세히 알고 싶다면 [[송호성(군인)|송호성]]문서와 [[1946-1950년 한국군의 숙군]]과정을 참조하기 바란다.[* 특히 제주도민들은 제주 4.3 사건으로 인하여 이범석 장군과 광복군 출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관련기사 : [[http://www.daej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497630|'천안의 인물' 조병옥·이범석 포함에 시민단체 반발]] 육군 정보국 소속 포병 소위 안두희는 김구를 암살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CMkIzHBta_8|관련영상 : 24분 10초부터, 안두희의 마지막 증언(1992년)참조]] 이른바 '''숙군(肅軍)의 대단원'''이었다. 당시 수사본부장으로 헌병대 실세는 일제 치하에서 조선인으로서 경찰 최고직위에 올랐던 [[전봉덕]]이었다. 의열단 출신에 중국군 상위였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36|장흥]]이 육군 헌병대사령관이었지만 실권이 없었다. 장흥은 김구 암살 다음날(1949년 6월 27일) 경질됐다. 잔불 정리만 남았다. 이범석은 숙군(肅軍)에 앞장섰지만, 순망치한의 화를 자초했다. 광복군 계열이 정리되자 그의 사조직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도 이승만의 압박으로 해체되면서 국방장관에서 밀려났다. 전쟁 발발 이후 내무장관으로 기용돼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272|부산정치 파동]]에서 크게 이용당한 뒤 결국 토사구팽 당했다.[* 그래서 광복군 출신들도 철기 이범석 장군 안좋아하는 사람들 꽤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