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유격전(遊擊戰) ===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 제 1지대로 편입된 조선의용대가 1941년 12월 12일 후좌장(胡家莊)전투 교전내용이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권에 수록되어있다. 전투는 1941년에 일어났으나 1942년에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되면서부터 수록했던 것으로 보인다. 교전 중 전사한 4명의 대원들만 공훈전자사료관 공훈록에 등재되어있고 나머지 대원들은 수록이 되어있지가 않다.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제 2지대(현 한국광복군 제 1지대 제 3구대) 第二支隊(現 韓國光復軍 第1支隊 第3區隊) 대장 (隊長) 김세광(金世光) 이하(以下) 삼십여 동지(三十餘 同志)는 평한선(平漢線) 스좌장(石家莊) 이남(以南) 백여리(百餘里) 되는 위안쓰현(元氏縣)에서부터 싱타이(邢臺) 일대(一帶)에 무장선전공작(武裝宣傳工作)을 맡아(擔任)하고 작년 11월昨年 十一月[* 12월 오타인듯하다.]부터 공작(工作)을 전개(展開)하여 오는 바, 해당每黨에 공작工作은 순리順理로 개시展開되엿다. 그리하여 11월 4일十一月 四日부터는 적 敵과 약간 접촉이 있어 우리대대동지 我隊同志들도 전부全部 무장武裝하야 경계警戒하여 오던 다음 11일 정오次 十一日 正午에는 2백여명 적二百餘 敵과 조우 遭遇하야 맹렬猛烈한 실력實力으로 적敵을 격퇴出退하고 그날 밤同 夜적 보루敵堡壘를 포위包圍하고 김세광 대장 동지金隊長 世光同志가 20분간二十分間 중국어中語로 국제정세國際情勢에 관關한 대적연설對敵演說을 하고, 김학철 동지金學鐵同志가 다시 일본어日語로 15분간十五分間 반전연설反戰演說을 하엿다. 그래도 적진영敵營에서는 아모(아무) 반응反應이 없음으로 조소경 동지趙少卿同志가 반전노래反戰唱歌를 하엿으나, 역시亦是 하등下等의 반응反應이 無없해서 도라오고 말엇다. 다음 날 翌日은 그곳을 떠나 잔황현贊皇縣으로 가기로 약속約束허고 그날 밤의 경계警戒는 지방地方 자위대自衛隊에게 일임一任하고 연일連日 전투戰鬪의 지친疫困한 몸을 휴식休息하기 위爲하야 하로 밤 잘-자기로 하엿다. > >'''전투 개시戰鬪의 開始''' > >12일十二日 날이 밝을 무렵拂曉, 밤 사이夜間 우리 부대我隊를 포위包圍하여 노코, 날이 밝이를 기다리던 적 敵은 먼동이 틀때 지붕위 屋頂上에서 보초放哨하고 있는 우리군我隊 조관 동지 曺寬同志를 향向하야 발사射出하엿다. 이리하야 깊은 안개 속에서 고요히 잠자든 깊은 안개充凉한 산촌山村은 갑자기 격렬激烈한 전장戰場으로 변變하엿다. > >조관 동지曺寬同志는 적敵의 총銃소리를 듯고, 급急히 김대장金隊長에게 보고報告할 때 지방자위대 대장地方自衛隊隊長도 와서 보고報告하기를 "적敵이 2리二里(약 800m)밖에서 아군我軍을 포위包圍 진공進攻하고 있으니 속速히 준비準備하라"고 하엿다. > >우리 부대我隊 동지同志들은 익숙習慣된 준비공작準備工作을 재빨리瞬間에 맟이고, 대문大門을 나가랴 할때 적 기관총敵 機關槍의 화력火力은 우리 대문大門에 집중集中하엿다. 그럼으로 대문大門으로 나갈 수 없는 우리 부대我隊 동지同志들은 집지붕屋頂에다 기관총機關槍을 걸고 환격(반격)還擊하였다 적敵의 화력火力은 다시 집옥상屋頂으로 집중集中하엿다. 이틈을 탄 우리 부대我隊 동지同志들은 속速히 대문大門을 나가 서쪽 산골짜리西便山끝로 퇴각退하랴 할때 적敵의 화력火力은 또 사면에서 우리 부대我隊를 향向하야 집중集中 공격攻擊하엿다. > >그때마참 적敵은 「敵は何處に居るか?(敵은 어데 있느냐?)」하고 소리첫다. 이것을 들은 우리我 김대장金隊長은 조용從容 침착沈着하게 「敵は南の方へ逃がたぞ(적敵은 남南쪽으로 도망逃亡쳣다)」 하고 답答하엿다. 적 敵은 이 소리를 듯고 남쪽방향南方으로 병력兵力과 화력火力을 집중集中하엿다. 이 틈을 탄 우리我 동지同志들은 급속急速히 서부고지西部高地를 점령占領하고 「이리 오시요!」 「이리 오시요!」 소리 찔너 혼란混亂한 우리 동지同志들을 집중集中식히며 일면一面 전투戰鬪를 계속繼續하엿다. > >적敵은 아군我軍을 향向하야 난사亂射, 김대장金隊長은 지휘 중指揮 中 처음으로 「다리」를 맞엇다. 이여서 복부腹部를 또 마젓다. 탄을 맞은中彈한 대장隊長은 벌서 신기神氣를 상실喪失하고 지휘指揮 소리는 점점漸漸 약弱하야지엿다. > >이것을 본 곁에 있든 조관 동지(신참 동지)曺寬同志(新同志)는 「대장 隊長 동무 고려정신高麗精神을 발휘發揮하시요!」하고 외쳣다. 대장隊長은 이에 감동感動되여 다시 정신精神을 차리고 기관총機關銃을 손에 잡고 쏘랴할 때 적敵의 탄환彈丸은 또 김세광 동지金世光同志의 왼편 손목을 명중命中하엿다. 하는 수 없이 총銃을 두고 다른 동지同志의 구원救援을 받게 되엿다. > >조열광 동지趙烈光同志는 다시 그 기관총機關槍을 가지고 사격射擊하야 할때 역시亦是 두발二發을 맞게 되엿다. 탄에 맞은中彈한 조열광 동지趙烈光同志는 10보十步를 다닐行할 수 없어 최후最後의 결심決心을 하고 적敵 오기를 기다리든 차次 김흠동지 金鑫同志가 지나며 그 광경光景을 보고 조열광 동지趙烈光同志를 등에 없고 안전지대眼前地帶에 탈출退出하랴 하엿다. 「기관총機關槍은 우리 부대대全隊의 생명生命이다, 나를 신경쓰지關心 말고 속速히 기관총機關槍을 가지고 가라」하고 조동지趙同志는 소리쳣다. 김흠 동지金鑫同志는 그래도 동지同志를 구救하라고 하엿으나 조열광 동지趙光烈同志는 두번 세번 거절再三拒絶함으로 하는 수 없이 총槍을 메고 가랴할 때 조관 동지曺寬同志가 지나게 되여 김흠 동지金鑫同志는 기관총機關槍을 조관 동지曺寬同志게 맡기고 조열광 동지趙烈光同志를 등에 업고 하루 사이一日間을 적敵의 포위包圍를 피避하여 안전지대安全地帶에 도착倒着하엿다. 신도 버선도 없이 山길을 달린 까닭에 「발껌지」와 「살」은 모도다 떠러지고 뼈밧게 남지 않엇다. > >그 후後 3개월간三個月間 치료治療하고 처음 것게 되엿다. 그리하야 대부 동지大部 同志는 안전지대安全地帶로 퇴출退出하 격전激戰하고 미처 퇴출退出하지 못하고 적敵에게 포위당包圍當하야 희생犧牲한 4 동지四同志의 전투戰鬪는 특特히 비장悲壯하엿다. 점령佔領한 고지高地에서 우리 동지我同志가 적敵에게 포위包圍되여 단독 분전單獨奮戰하며, 육肉박하는 것을 반히 보면서 구救할 수 없이 그대로 희생犧牲싴이는 우리 부대我隊 동지同志들의 심정心情이 어찌如何하엿을가?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004|손일봉]] 동지孫一峯同志는 처음 적敵과 보총步槍으로 싸우다 다시 접근接近된 적敵에게 수류탄手榴彈을 던저 많은 적敵을 죽이엿다. 수류탄手榴彈까지 다 쓰게 되여 탄환彈丸이 다 떨어져盡함에 손 동지孫同志를 사로 잡으라는 적敵과 육肉박이 시작始作되엿다. 이 육肉박 격투格鬪를 목도目睹하는 우리부대 동지我隊同志는 하는 수 없이 그를 향向하야 기관총機關槍을 소사掃射하엿다. 도저到底히 사로 잡어갈 수 없음을 안 적敵은 최후最後의 방법方法으로 각도刻刀로 손 동지孫同志의 왼편 가삼을 찔너 죽엿다.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005|왕현순]] 동지王現淳同志는 대문大門을 나와서 뒤담에다 은신隱身을 하고 적敵과 격전激戰하다가 가지고 있는所有의 탄환彈丸을 다 써버리고便用하고 부당不幸히 적敵의 탄환彈丸이 데징大腦에 명중命中하야 소장小腦를 둘고 나가게 되여 즉사卽死하엿다.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007|최철호]] 동지崔鐵鎬同志는 집 지붕屋頂에서 격전激戰하다 하는 수 없이 뒤담을 뛰여서 넘어 가다 국부局部를 명중命中 당當하야 신음呻吟하다 죽엇다.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003|박철동]]동지朴喆東同志는 탄환彈丸을 다 써버리用盡하고 사로잡으려는 2명 적二敵과 잡히여 가지 않으려고 육박격투肉博格鬪하여 언덕에서 골창으로 굴너가며 악전고투惡戰苦鬪하다가 적敵은 하는 수 없음을 알고 속력刺力로 왼편 가삼을 찔너 죽엿다. 사체死體를 발견發見할때 동지同志는 두 눈을 드고 이를 악물고 두 손으로 자기自己 옷 가슴을 혓치고 꿀어 안즌 채로 죽엇다. 동지同志의 장렬壯烈한 죽엄을 전 화북全華北 방방곡곡坊坊谷谷에 가장 영英용한 고차故事로 전傳해지고 있다. > >적과 아군敵我의 격렬激烈한 전투戰鬪가 두 시간時間 반半을 경經한 후後 우방군友軍의 지원군援軍이 도착到着되자 적敵은 허겁지겁慌하야 격퇴擊退하엿다. 이 다음此後에 백여명百餘 적敵을 격폐擊斃고 무수無數한 전리품戰利品을 확취獲取하엿다. 우리 군我軍은 손일봉孫一峰 · 왕현순王現淳 · 최철호崔鐵鎬 · 박철동朴喆東 4 동지四同志가 비장悲壯히 희생犧牲되고 김세광金世光 · 조열광趙烈光 · 황통삼黃通三 동지同志가 부상을 입음受傷하엿다. -끝-[*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권, 임시의정원 Ⅱ, 우리 통신] ㅇ [[김승곤]] 지사는 구룡산, 오동산전투에서 일본군과 수십차의 전투와 유격전 수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일전 경험, 일본군의 실정과 의용대의 형편, 그리고 '''전투의 실상과 유격전의 내용'''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하였다.[*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증언자료집 1권 광복군편] 면담자 | 김행복(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사부장) 면담일시·장소 | 2001년 12월 1일, 12월3일·서울보훈병원 >Q: 구룡산, 오동산전투 싸워보셨습니까? >김승곤: 우리 전지가 거기야, 전지가. 거기서 많이 싸웠죠. > >Q: 주로 싸우는 방법이라든가 상황이 어떠 했습니까? >김승곤: 조우전이요, 조우전. 우리가 공격을 먼저 못해요. 야간에 우연히 일본놈을 만나서 (싸워요.) 중국군은 원체 궁해서 밤에 야습을 많이 나가요. 일본놈 군복이 3원이야 3원. > >Q: 그럼 아까 말씀하신 경찰 봉급과 같으네요. >김승곤: 털이 있거든. 그 다음에 군에 있는 담요, 그거는 5원이고. 상당히 고급품이지요. > >Q: 그렇군요. >김승곤: 그래서 어떻게 하는고 하니, 중국 사람들은 밤에는 야습을 나가. > >Q: 그럼 주로 일본놈들 보급품을 훔치려고 야습을 가는 것이란 말입니까? >김승곤: 그렇지요. 중국 군대는 숫자가 많으니까, 저녁마다 야습을 가요. 또 가기를 원하고. 잘 먹으니까. 그놈 팔아서 저의 욕구를 채우지. 그러면 야습 습격조를 구성해요. 3개 조로 편성하는데, 제일 앞에 가는 조는 사람 둘이 가요. 칼만 들고 가서 입초를 칼로 찔러 죽여요. 한밤 중에. 그래야 아무도모르잖아요. 그 다음은 공격조. > >Q : 두 번째 조군요. >김승곤 : 첫 번 째 조가 지나가면 두 번째 조는 수류탄을 던져요. > >Q : 수류탄을 던지면 소리가 크게 날 것이 아닙니까? >김승곤 : 소리가 나죠. 그 때 일본놈들이 다 도망가죠. > >Q : 일본놈들이 도망을 가요? >김승곤 : 도망을 가죠, 어떻게 해? 그러면 이제 추격대. 중국 사람들은 당가대라고, 중국 사람들이 메고 다니는. 담요, 군복 벗어 놓은 것을 몽땅 싣고 가서 골라서 팔아먹어요. 잘 팔리거든. 담요는 더 잘팔려. 오죽 하면 그렇게 하겠어요? 중국군은 서로 갈려고 그래요. 그렇지만 부대장은 안 시켜요. 부대장은 안 시키지요. 아니요. 큰 사건 나면 어떻게 해요. 그래서 부대장이 안 시켜. 졸병들이 가자면 할 수 없이 가고. 그만치 부패했어요. > >Q : 그렇다면 일본군도 중국군이 야습을 올거라고, 그만큼 많이 당해받으니까, 조심을 하고 대비를 하지 않았을까요? 야습을 올거라고 경계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김승곤 :일본군은 아니 낮에 보초를 서고 있다가 밤에는 거둬들여요. > >Q : 밤에는 거둬들여요? >김승곤 : 그럼요, 무서워서. 밤에는 꼼짝 못해요. > >Q : 그래도 밤에 꼼짝을 못한다면 철조망을 쳐 놓는다든가 그래도 대비를 해 놓지 않았겠습니까? >김승곤 : 그래서 낮에 가서 다 조사를 해요. 일본군이 자리를 옮겨 놓기도 해요. 어떤 때는 허탕을 칠 때가 있어요. 중국 군대가 그런 데는 용감해요. 먹고 살기 위해서. 생존본능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Q : 그렇게 들어가다가 일본군들과 맞붙어서 죽고 다치고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김승곤 : 앞에 두 사람이 있지요. 들어가다가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든지 해도 말도 못해요. 정말 보초는무서워 해요. 새벽 한 시, 두 시, 세 시에 고단합니다. 밤 중에 들어갔다가 많이 죽어. > >Q : 잘 못 들어가다 보면 총에 맞아 죽는 수도 생기겠지요? >김승곤 : 찔러 죽이든가. 인정사정 볼 것 없으니까. 이쪽에서는 수류탄 가지고 가서 던지지요. 그러면 팡팡 소리가 나고, 그 다음에는 추격대, 당가대가 싸가지고 돌아오죠. > >Q : 그러면 성공이네요? >김승곤 : 그렇지 성공이지요. > >Q : 지사님께서도 습격조에 가 보신 적 있으십니까? >김승곤 : 중국 사람들이 못 가게 해요. > >Q : 못 가게 해요? 한국 사람들을 못 가게 해요? >김승곤 : 절대. 우리는 한 사람 희생되면 보충할 수도 없고. 중국 군대에서 아껴주기도 해요. 사람들은 아껴줘요. 중국 사람들은 한자를 쓰잖아요? 중국에는 만 명 중에 글 아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라구요. > >Q : 한국 사람들은 글 아는 사람이 많겠… >김승곤 : 그렇지요. 학교는 다 나왔으니까. > >Q : 그 대신에 중국 사람이 가져온 물건을 달라고 한다든가 그러지는 못하겠지요? >김승곤 : 그렇지요. 달라고 못해. 달라고 못해. 제 3 징모분처 한교전지공작대원으로 활동한 정영호 지사의 회고[* 정영호, 아름다운 마음, 운초서사, 1995, p520] >정영호 : 안후이성(安徽省) 마오린(茂林)에 본거를 둔 광복군 제3 징모처의 한교전지공작대원(韓僑戰地工作隊員)으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중화민국 제 3전구 제1유격종대사령부 대일책반 공작대원(中華民國 第三戰區 第一珽進遊擊從隊 對日策班)으로도 활동했지요. 3년 여 동안 태평천국의 무대였던 저장(浙江省), 안후이성(安徽省)의 그 넓은 벌판을 누비고 다녔어요. > >A : 구제척으로는 어떤 공작을 했습니까? >정영호 : 우리의 공작지구는 혼전지대였어요. 일본군과 장제스(蔣介石)의 중앙군(中央軍)[* 수도 난징과 상하이가 근처에 있는 3전구를 중앙군이라고 불림]이 있으며 마오쩌둥(毛澤東)의 씬쓰준(新四軍)이 있었지요. 광복군도 중앙군과 신쓰준[* 연안파 조선의용군을 말함. 제 3징모분처가 중국군 제 3전구내에서 활동하는데 공산화된 조선의용군이 중국 신사군(新四軍)과 관계를 가져 말썽을 일으켰다.] 두 갈래로 속해있었죠. 우리는 중앙군 산하의 50명 한국인으로 구성된 부대였습니다. 일본군의 괴뢰군[* 왕징웨이 정부의 화평건국군(和平建國軍)]도 있고 민병대격인 대도회(大刀會)도 있었습니다. 여기에다 미 제 5공군(5th Air Force)산하 공수단이 절간 같은 걸 점령하여 활동하고 있었죠. 우리 부대는 일본군의 동향을 파악하여 미군부대에 정보를 주면 '''미 제 5공군이 타전하여 폭격하게 하는 임무'''가 많았어요. 병참루트를 끊으라는 지령을 받고 '''교량폭파공작'''도 했죠. 중국인을 사서 폭약을 주고 우리는 먼 발치서 보고 있다 폭파되는 것을 보고 사라지지요. 또한 일본군에 있는 한국인을 중국 사람을 시켜 빼내거나 탈출해 숨어있는 사람을 구출하여 광복군 부대에 보내는 일도 했어요. 저도 지금 천안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분을 비롯하여 6~7명을 구했어요. 1945년 6월, 일본군 최후 발악으로 제 3전구 유격지구에 대한 소탕작전을 전개한다. 작전 지구에서 공작 중이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74|박승학]](朴承鶴)을 방문한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59|김해일]](金海一),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61|유익배]](柳益培)는 안후이성(安徽省) 지에시현(結溪縣) 부근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당했으나 중국군 유격대의 도움으로 포위망을 탈출하여 후이저우현(徽州縣)으로 돌아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