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광복군 (문단 편집) === 광복군 구성원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3008|김천성]](金天成) 일찍이 중국으로 건너가서 1939년 10월 충칭(重慶)에서 나월환(羅月煥)을 대장으로 하여 결성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가입하였다. 그 해 겨울 공작대가 시안(西安)으로 이주하자 이해평(李海平)·김동수(金東洙) 등과 함께 일선지구인 산시성(山西省)으로 파견되어 후쭝난(胡宗南) 직속의 중국 유격대와 합류하여 정보수집·적정탐색·초모공작 등을 전개하였다. 특히, 단신으로''' 일본군 여단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루안(潞安)에 잠입'''하여 문응국(文應國)[* 나중에 인면전구공작대 부대장이 된다.]을 초모한다. 스자좡·북경·타이위안 등지에서 국내침투 공작을 전개하던 중, 1945년 5월 일본 헌병에 잡혀 갖은 악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광복을 맞은 지 3일 만에 총살당하였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512|이현근]](李炫瑾) 정화암 선생이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로 개편할때 회상하던 인물로 1931년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에는 유자명(柳子明)이 조직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중국육군군관학교 제11기생으로 입교하여 제1총대 보병과(第1總隊步兵科)를 1936년 10월에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임명되었으며, 그 뒤 보병상위(步兵上尉)로 진급하고 제6사 제17여 제31단 제2영 제6연장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7월 일본의 중국본토 침략이 본격화됨에 따라 한구(漢口)전선 등에 참전하여 싸우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 '''이소민(李蘇民)''' 광복군 제 1지대 제 2구대장, 이소민(李蘇民) 상교(上校)는 중국 황포 군관 학교 출신인 관계로 제 3전구내에 많은 선배·동창·후배 등이 있어서 섭외 활동이 원활하게 진행되었으며, 1943년까지 초모공작 실적을 못내던 제 2지대 3구대 3분대장 김문호와 경쟁에서 우월한 우위를 점했었다.[* 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 문서를 보면 김문호 대장 휘하 20명도 안되는 인원이 있었는데, 이소민 부대 출신들 몇명으로 채워졌었다. 이 부분은 정화암 회고록에 자세히 나타나 있는게 이소민과 김문호 둘이 대판싸우고 이소민 자기 부하 몇명을 붙여줬다고 한다.] 또 구대장 자신이 중국군 상교(上校)로 중국군에도 군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군과의 연결이 잘 되었다. 그러나, 광복군으로서의 공작 활동은 다소 소홀한 감마저 있었기 때문에 지대 본부로부터 경고를 받은 일도 있었다. 약산 김원봉 사람으로 해방 후에는 북한으로 간 것으로 보이며 그렇기 때문에 공훈전자사료관에 등록되어있지 않으나 하지만 광복군 역사 공부하면서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는 이유는 김영관 지사가 일본군 부대에 탈출하여 이소민 부대에 광복군 입대 선서를 했었다.[*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805620.html] >1944년 12월3일 일요일, 저녁을 먹은 뒤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부대의 철조망을 넘었다. 3명의 탈출자는 밤새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이튿날 저녁 한 마을에서 중국 청년들을 만나 필담을 나눴다. >“우리는 한국 청년으로서 일본 군대에서 탈출했다. 충칭에 있는 한국 임시정부에 가고 싶으니 장개석 군대가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달라.” >“탈출을 환영한다.” “고생 많았다.” >중국 청년들은 뜨거운 박수와 포옹으로 김영관 일행을 맞아줬다.하지만 고난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찾아가는 도중에 일행 5명(다른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한 박승유, 이희화가 도중에 합류)은 차례로 풍토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1천여 킬로미터를 걸어 장시성 옌산(鉛山)에 1945년 2월 중순 도착했다. 중국군의 주선으로 옌산에서 마침내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장 이소민'''을 만났다. >-탈출한 뒤 거의 석달 만에 광복군을 만났는데. >“정말 감격적이었다. 우리가 머물고 있던 중국군 부대로 이소민 구대장의 인솔 아래 젊은 청년 7~8명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걸어왔다. 그때 태극기를 처음 봤지만, ‘태극기에 대하여 경례’ 구호에 맞춰 거수경례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양 볼에 줄줄 흐르더라. 애국가 제창 때도 우리 탈출병 5명은 곡(당시는 영국 민요인 ‘올드 랭 사인’이었음)을 몰라서 따라 부르지 못했지만,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는 가사를 들으면서 그저 눈물이 흐르고 또 흘렀다. 그 순간을 영원히 못 잊는다. 그때의 감격이 내게는 초심이다. 양심대로, 또 나라 배반하지 않으면서 거창하지 않더라도 국가와 사회를 돕자는 생각으로 지금껏 살아왔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605|박승유]](朴勝裕) 할아버지는 '''을사오적'''이자, 1910년 강제 병합 시 내부대신 겸 내각총리대신 서리였던''' 박제순(朴齊純)'''이고, 아버지 박부양도 부친의 자작 작위를 계승한 친일파이다.[* 결국 최고 친일파 손자도 학병으로 전선에 끌려간다.] 1944년 10월에 절강성(浙江省) 의오현(義烏縣)에 주둔 중인 일본군 카사이(橫井)부대에 배속되었다가 탈출하여 광복군 김영관, 이희화와 합류 후 이소민 부대에 입대하였다.그는 무석(無錫), 무호(蕪湖), 남경(南京)지역에서 초모공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음악에 소질이 있던 터라서 야전 방송대에 파견되어 같은 동포 사병들에 대한 반정(反正)권고와 염전(厭戰)가곡 등의 방송으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해방 후에는 강원대학교 음악교육과 교수를 했으며 조용히 선친의 잘못을 뉘우치고 살았다고 한다.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05|김우전]](金祐銓) 1944년 1월 일본군에 징병되어 중지나 파견군 제7995부대에 근무 중 부대를 탈출하여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중국 제10전구 중앙군관학교 분교 간부훈련단 한광반을 졸업하고 광복군 제3지대에 소속되었다. 그는 제3지대 연락장교로 임명되어 곤명 미제14항공단에 파견되었다. 그는 oss본부에서 '''광복군 무전기술 교재와 한글 무전암호문'''을 제작하였다. 하지만 일본이 패전하면서 이 무전기술 교재와 한글 암호문은 사용되지 못한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289|장철부]](張哲夫) 1945년 3월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추천으로 중국 황포군관학교 20기 기병과로 입학하여 1947년 2월 졸업하고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에 입교하여, 1948년 육사 5기로 임관하였다. 1949년 육군본부 직할 독립기갑연대가 창설되자 기갑연대 예하 부대인 제2기병대대장(소령)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기병대대장'''으로 참전하여 여러 전투에서 전공을 올렸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34|조일문]](趙一文) 남경(南京)의 중앙대학 재학 당시 송지영(宋志英)·이일범(李一凡) 등과 함께 한족동맹(韓族同盟)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애국청년 규합, 일군 동태 탐사, 초모인원 후송공작 등의 임무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1944년 초에 남경(南京)에서 지하공작을 펴 오던 임정특파원 김병호(金炳豪)가 일경에게 체포됨으로써 남경 중앙대학 학생들의 일대 검거 선풍이 불게 되었다. 그는 이일범(李一凡) 등 10여명과 함께 남경(南京)을 탈출하여 제3전구 지역인 무림(茂林)으로 왔다. 이때 그는 '''남경 주둔 일군이 보관하고 있는 기밀 문서를 대량 탈취 휴대하고 왔는데 이 기밀 문서 중에는 일본군 병력배치상황, 연합군의 기습상륙작전을 방어하기 위한 작전계획, 중국 연해안탐측량(沿海岸探測量), 군용지도, 기타 기밀 문서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기밀문서는 제3전구 사령장관에게 보내지고 이어 중국군사위원회에 보고됨으로써 대일작전수행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후 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강남분대에서 전방공작과 적후방 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487|선우진]](鮮于鎭) 광복군 제3지대 제6분처가 있는 부양(阜陽)에서 광복군에 입대하였으며 적지구 선전공작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1944년 8월에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 간부훈련반 부설 한국 광복군 간부훈련반에 입교하여 3개월간 군사교육 훈련과정을 수료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 시기에 백범 김구선생님을 보좌하는 비서가 된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020|장준하]](張俊河) 서주(徐州)지구에서 일본군 진영을 탈출하여 김준엽(金俊燁)·홍기화(洪基華) 등과 함께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1944 5월부터 10월말까지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 간부훈련단에 병설로 설치된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에서 훈련을 받고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활동하였다. 한광반 훈련 당시 여가를 이용한 과외 활동으로''' 김준엽(金俊燁)'''과 함께 교양과 선전을 위한 잡지인 '''"등불"'''을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켰으며, 광복군의 존재를 중국인들에게 알리기도 하였다. 1945년에는 한미합작특수훈련인 OSS훈련 정보·파괴반에 배속되어 훈련을 받고 국내진공반 선발대로 뽑혀 김준엽, 노능서, 이범석 장군과 여의도 공항에서 일본군 항복받으려다 무산되어 귀국한다. '''돌베개: 장준하의 항일대장정'''이란 회고록으로 유명하다. 해방 이후, 이범석 장군의 조선민족청년단에서 활동했으며 나중에 박정희 대통령과 각을 세우다가 등산 중 의문사를 당한다.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452|김준엽]](金俊燁) 1944년 2월 16일 중국 서주지역의 일본 츠카다(塚田)부대에 배치되었다. 이곳에서 기초훈련을 받고 근방의 경비중대에 배치된 그는 1944년 3월 하순 부대를 탈출하여 중국 중앙군 소속 유격대에 배치되었다. 뒤이어 탈출해 온 장준하·윤경빈 등과 1944년 6월 중국유격대를 떠나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향해 출발하여 임천(臨泉)에 도착한 후 광복군 초모위원회에 의해 입대하였다. 입대 후 한광반(韓光班)에 입교하였다. 한광반 1기를 졸업한 후 장준하·신현창(申鉉昌) 등 30여 명과 함께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하게 되자, 1945년 2월 5일에 한중문화협회 주최로 학병탈출 35명의 한국청년환영대회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어서 그는 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되었으며, 1945년 8월초에는 oss훈련 정보파괴반을 수료하고 광복군 국내정진군 강원도반 반장에 임명되어 국내진입의 날을 기다리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고려대학교 총장으로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교육자로 살았으며 김준엽 '''장정'''이란 회고록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