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민주당 (문단 편집) === 창당과 세력 구축 === 1945년 [[8.15 광복|광복]] 직후 좌익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빠르게 정치세력화에 성공한데 비해 우익-민족주의 인사들은 한동안 사태를 관망했다.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한다는 소문이 돌았을 뿐더러 국내의 우익 인사 대부분은 일제 말 독립운동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18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원세훈]]이 민족주의 진영에서 최초로 고려민주당을 창당했다. 참고로 고려민주당은 계보상 최초의 민주당계 정당이자 의외라면 의외로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 노선을 내세운 진보 정당이였다. 8월 말, 38도선 이남으로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은 우익, 민족주의 인사들이 관망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정치 세력화하는 계기가 됐다. 이에 8월 28일 [[김병로]]와 [[이인]]이 조선민족당을 창당했고 이에 호응한 원세훈의 고려민주당을 합당시켰다. 유학 경험을 가지고 있던 국내 인사들도 정치세력화를 시도했는데, [[김도연(1894)|김도연]], [[김성수(1891)|김성수]],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 [[유억겸]], [[윤보선]], [[윤치영]], [[허정]] 등은 [[장덕수]]를 중심으로 한국국민당을 발기한 것이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뭉친 공산주의 좌익과 달리 우익-민족주의 정당이 난립하자 내부에서 통합 요구가 거세졌다. 9월 4일 조선민족당과 한국국민당은 통합 발기회를 개최하고 9월 6일 경성부 종로구 낙원정의 협성실업학교에서 한국민주당 창당 발기인대회를 열었다. 주최측은 700명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200 ~ 300명 정도 모였다고 한다. 반면, 같은 날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도 종로구 계동정의 경기여고 강당(당시 건준의 본부)에서 인민대표자대회가 열렸는데 무려 1,000명이 모였다. 300명이나 1,000명이나 [[도찐개찐]] 같아 보여도 당시 참여 숫자는 굉장히 중요했는데, 참여 숫자는 곧 자신들의 세력을 의미했다. 그만큼 좌익~중도 성향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대중들로부터 인기가 많았고, 중도~우익 성향의 한국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없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9월 16일 정식으로 한국민주당은 창당대회를 열었다. 9월 21일 중앙부서를 확정해 총무제를 실시했다. 1도(道) 1총무의 원칙에 따라 [[함경도]]의 [[원세훈]], [[전라북도]]의 [[백관수]], [[경상북도]]의 [[서상일]], [[경기도]]의 [[김도연(1894)|김도연]], [[경상남도]]의 [[허정]], [[충청남도]]의 [[조병옥]], [[황해도]]의 [[백남훈]], [[평안도]]의 [[김동원(정치인)|김동원]] 등 8명의 총무를 뽑았다. 송진우는 수석 총무(당수), 김병로는 중앙감찰위원장, 이인은 당무부장, 장덕수는 외무부장, 김약수는 조직부장을 맡았다. 여담으로 한국민주당 발기인 중 한 사람이었던 [[장덕수]]가 발기문 및 성명서를 기초 작성했는데, 주 내용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을 대차게 까는 글이다.[[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d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dh_001_1945_09_08_0060&position=-1|#]] 한국민주당은 [[미군정]]과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좌익 세력의 득세를 걱정했던 미군정은 반대 성향의 한국민주당을 환대했고, 한국민주당 인사들은 미군정의 고문관, 행정 관리로 대거 임용됐다. 미군정 군정장관의 고문직 11명 중 9명이 한국민주당 인사였을 정도였다. 면면을 보면 경무국장 [[조병옥]], 경기도 경찰부장 [[장택상]], 대법원장 [[김용무]], 대법관 [[이인]], 인사과장 대리 [[정일형]], 학무국장 [[유억겸]], 위생국장 [[이용설]] 등. 참고로 나머지 2명은 [[여운형]], [[조만식]]. 한국민주당 인사들은 미군정에게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비롯한 [[조선인민공화국]]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여운형]]과 [[안재홍]]을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친일파(...)라고 주장하였다.[* 여운형은 일제강점기 말기에도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해 활동하는 등 엄연한 독립운동가였고, 안재홍 역시 철저한 비타협 민족주의자로 변절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는 당시 한국민주당에 많던 친일 콤플렉스가 작동한거 아닌가 하는 시선도 있지만, 사실 한민당 역시 독립운동가들도 제법 참여한 정당이긴 했다. 하여튼 이들은 당시 시민들로부터 지지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광복 직후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았던 여운형과 안재홍 등 스탈린주의보단 사민주의에 더 가까울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세력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며 비난하였다.] 10월 10일 미군정 군정장관 아치볼드 아놀드가 조선인민공화국을 "사기꾼에 의한 괴뢰국"이라 비난하자 한국민주당은 자신들의 성과라며 자찬했다. 한국민주당의 최대 계파는 김성수, 송진우, 장덕수 등 [[동아일보]] 계열이었다. 동아일보 세력은 수양동우회[* [[안창호]] 등 서북 지방의 [[장로회]] 인사가 중심이 됐다. [[흥사단]]의 자매단체로 [[조병옥]]이 수양동우회 회원이다.], 흥업구락부[* [[이승만]], [[이상재]], [[윤치호]], [[유억겸]]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다. 경기 지방의 [[감리회]] 신자가 중심이 됐다. 이승만의 독립운동단체였던 대한인동지회의 자매 단체였다.][* 흥업구락부와 수양동우회는 서로 경쟁 관계였다. 참고로 대한인동지회와 흥사단의 모체인 대한인국민회로부터 이들은 '''기호파 대 서북파'''로 대립했다.]와 연합해 당을 장악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독립운동 경력이 있어도 1910년, 1920년대에 집중되었으며, 1930년대 후반부터는 친일 행위에 협력한 이들이 많았다. 때문에 시민으로부터의 지지기반이 약했다. 한국민주당은 [[독립운동가]]들도 있긴 했지만, 친일 출신의 [[지주]] 및 [[자본가]]들이 점차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시민들의 인식이 당연히 그닥 좋진 않았다. 물론 초창기 한민당을 마냥 꼴통 친일 우익 정당으로 매도하기엔 [[김병로]], [[김약수]], [[원세훈]] 등 친일 경력이 없고 진보적이며 개혁적인 인물들도 제법 있었다. 이들 중 김약수, 원세훈 등은 당내 좌파 겸 사회주의 우파로 한민당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이들이 지지한 원세훈은 초대 수석총무(당수) 송진우가 암살 당한 이후 임시 수석총무에도 오르나 좌우합작과 토지개혁에 대한 한국민주당의 소극적 태도에 실망감을 느끼고 1946년 10월 무렵 탈당하고, [[김규식]] 계열에 합류해 [[좌우합작운동|좌우합작위원회]]에서 활동하게 된다. [[송남헌]]도 처음엔 한국민주당에 있다가 점차 실망감을 느껴 탈당한 이후부턴 김규식의 비서로 지낸다. 한민당 세력은 국내 독립운동 세력(건국준비위원회, 조선공산당 등)과는 대립하는 관계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해외에 있었던 독립운동 세력을 봉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표적 원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만을 정식정부로 봉대하고 기타 정부를 자칭하는 단체를 배격한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지를 보였던 또 다른 인물은 [[안재홍]]이 있었는데, 안재홍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협력할 수 있는 관계로 보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뼈대로 과도정부를 세우더라도 임시정부 그대로는 안 될 것이니, 그를 보완하는 역할을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지를 선언했다. 즉, 안재홍은 국외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동급의 선상으로 놓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한 것이다.] 한국민주당은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하고 [[이승만]], [[서재필]], [[김구]], [[이시영(정치인)|이시영]], [[문창범]], [[권동진]], [[오세창]] 등 임시정부 간부와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영수로 추대하였다. 미군정에 임시정부 인사들의 조기 귀환을 여러 차례 요청하기도 했다. 한국민주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용하여 취약한 지지율을 보완하고 원로들의 이름을 빌려 세력을 결집하려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외의 해외에 있었던 다른 독립운동 세력은 국내 지지도가 비교적 낮았고, 엄연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독립운동의 대표기관이 존재함에도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자신들과 대등한 위치를 요구하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아[* 이는 [[국민대표회의]]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고수해온 입장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당시 임시정부 이외의 세력들은 임시정부의 위치를 다른 독립운동 단체와 동등히 할 것 혹은 임시정부를 해산하고 통일적인 새로운 단체를 만들 것을 주장하였으나, 1920년대 국민대표회의에 제대로 데인 바 있는 김구는 이를 거절해왔다.] 추대를 받아들이고 한국민주당과 협력하였다. 한국민주당은 임시정부 인사들이 귀환하자 환영성명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 재편을 주문했다. 이승만이 자신이 만든 좌우통합 조직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우익 통합을 주장하자 임시정부 중심의 통합을 옹호하기도 했다. 12월 한국민주당은 임시정부개선환영대회를 개최하고 애국금헌성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 인사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덕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심이 된 '특별정치위원회'가 조직되어 정치 세력 재편을 시도한다. 한편 국내에 있던 권동진과 오세창은 영수직을 수락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국내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관점에서 한국민주당은 친일 문제에서 자유로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