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외국어대학교 (문단 편집) === [[한국외국어대학교/역사|역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한국외국어대학교/역사)]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8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2140, #002D56, #002140)" [[파일:한국외국어대학교 캐릭터_금색.svg|width=25]] {{{#b99d7d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역사'''}}}}}} || || '''년도''' || '''연혁''' || || '''1954''' || 한국외국어대학 (Foreign Language College of Korea) 개교 || || '''1957''' || 이문동 캠퍼스로 이전 || || '''1962''' || 대학 영문 명칭 변경 (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 || ||<|2> '''1980''' || 용인분교 개교 || || 종합대학 한국외국어대학교로 승격 || || '''1998''' || 재단 개혁 및 제2건학 선포 || || '''2010''' || 용인캠퍼스를 글로벌캠퍼스로 명칭 변경 || || '''2014''' ||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캠퍼스-글로벌캠퍼스 통합 || [[동원육영회|한국육영회]]의 '''{{{#872434 한국정경대학교}}}'''와 대한민국 정부의 '''{{{#00356b 국립 서울외국어대학}}}'''의 설립 의지가 모여 개교했다. [[1952년]] 한국육영회 이사장 동원(東園) 김흥배 박사는 한국정경대 설립을 도모하고 있었고, 당시 정부는 국가 재건을 위해, 외교관 양성과 인재들의 해외 유학을 지원할 외국학 대학교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국립 대학이 범람한다는 여론[* 실제로 대부분의 [[거점국립대학교|거점 국립대학교]]는 이쯤에 설립되었고, 정부 재정은 빠듯했다. 문교부 장관과 외국어학교설립위원회는 제반 사항을 검토한 결과 당시 정부 재정으로 새로운 국립대학을 건설하는 것은 매우 무리라는 결론을 도출했으며, 결국 정치경제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학교법인을 인가받은 한국육영회를 설득하여 외국학 대학교를 사립의 방식으로 건설하기로 합의에 이른다. 다른 국가의 외국학 대학교는 모두 국립대학인데 한국만 사립으로 운영되고 있는 이유가 가난하고 쓰라렸던 전쟁 이후의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에 외국어대학을 국립으로 설립하는 과정은 번번이 실패했고, 따라서 정부는 사립으로라도 외국어대학을 설립하려고 했고 때마침 한국정경대를 설립하려는 한국육영회와 뜻을 합치게 된다. 전쟁 이후 황폐해진 조국에서 [[영국]] 정부와 [[UN]] 한국재건단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1954년]] 한국외국어대학(Foreign Language College of Korea)의 이름으로 공식 개교한다. 설립자 김흥배 박사가 한국외국어대학이라는 이름을 제안하였고 [[1953년]] [[10월]] 정부가 이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1962년]] 영문명을 '''{{{#008294 H}}}ankuk[* [[1946년]] 지금의 이름을 가지게 된 [[고려대학교]] 등과 혼동되는 것을 방지][* 일상적으로 [[대한민국]]을 부르는 '''[[한국]]'''이라는 발음을 세계에 더욱 널리 알릴 수 있도록.] {{{#008294 U}}}niversity of {{{#008294 F}}}oreign {{{#008294 S}}}tudies'''로 교체하여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1980년]] 종합대학 인가를 받으며 국문명을 '''{{{#008294 한국외국어대학교}}}'''로 변경하였다. 부패한 이사회를 몰아내고자 봉기한 1998년의 학생 혁명 성공으로 '''공영 재단'''[* 2005년 사립학교법 개정 이전에도 외대는 총학생회에서 이사회 인사 추천이 가능했다. 총학생회는 이사회 임원 9명 중 1명을 추천 선발한다. 이사회 임원 9명 중 3명은 [[대한민국 교육부]]가 추천한다. 이남주 전 이사장은 본교 졸업생 신분으로 공영 재단 안정화 이후 무려 12년간 본교 이사장을 역임했다. 과거 재단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데, 이사회 임원 중 1명은 아직도 구 재단에서 추천하며, 현 김종철 이사장이 구 재단 추천 인사이다.]이라는 전무후무한 학교 운영 체제가 성립되었으며, 98년 제2건학 운동의 결과로 다른 학교들과 다르게 대학교 총장과 총학생회의 권한이 매우 강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