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은행 (문단 편집) == 기타 == *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인만큼 시중은행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한 보안을 자랑한다. 청원경찰이라고 편의상 부르지만 실제론 일반 경비원이 배치되는 시중은행과 달리 한국은행은 청원경찰법에 따른 정식 [[청원경찰]]들이 보안을 담당하며 이들은 평소에 총기를 휴대하는 것도 가능하다. 한은 청경들은 권총과 소총은 물론 기관총까지 보유하고 있으며 [[민방위|민방위훈련]] 중에도 현금수송차를 그대로 운행시켜 경찰의 추격을 받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러나 현금수송차 동선이 노출되어 범죄에 취약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 1946년부터 남자 실업농구단을 운영하여 1970년대까지 산업은행, 기업은행과 함께 금융팀 3대장으로 군림하여 명센터이자 훗날 KBL 패밀리 초대 회장을 지낸 백남정, 前 삼성전자 감독 김인건 등의 국가대표 선수들을 배출해냈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삼성그룹]], [[현대그룹]] 등 대기업이 실업팀을 창단해 거액을 들여 좋은 선수들을 스카우트하는 바람에 성적이 급감하여 1983년 [[농구대잔치]] 출범 이후 오동근과 김재득이 분투했음에도 언제나 승수셔틀 신세로 밀려났다. 결국 1996년에 팀이 해체되었는데 해체 후 이승학, [[김상준(농구)|김상준]], [[김영래]] 등 3명은 [[원주 동부 프로미|원주 나래 블루버드]]에 입단하고[* 프로농구가 출범할 때 금융권 팀들은 모두 없어졌다. 원주 나래 블루버드가 창단할 때 위의 한국은행 선수 3명과 산업은행 농구단 출신 선수들이 1팀으로 모였고 기업은행 농구단 선수들은 [[부산 kt 소닉붐|광주 나산 플라망스]]로 소속팀이 바뀌었다.] 다른 선수들은 그대로 은퇴했다. * 내부 결정 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에서 [[통화정책]]을 결정한다. 또한 한국은행의 운영[* 이는 한국은행 법에 한국은행 정관변경, 한국은행 조직 및 기구, 한국은행의 예산 및 결산, 한국은행 직원의 보수기준의 결정으로 명시되어 있다.]에 관련된 의사결정을 내린다. 이 부분은 사기업의 이사회와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 본부에서는 화폐금융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는데 [[짐바브웨 달러]] 같은 국내에서 보기 힘든 신기한 돈도 있으며 지역 본부들은 부속 화폐전시실을 운영하고 있다. * 한국은행의 수장은 [[한국은행 총재]](韓國銀行總裁)로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한 인물이라 [[장관]]급 대우를 받으며, 국회 [[인사청문회]] 대상이다. 일전에 '한국은행 총재'를 '한국은행장'으로 바꾸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통용되는 지폐에 한국은행 총재의 직인이 들어가기 때문에 화폐를 일시에 교체할 수 없어 시행되지 않았다. 단, 한국 뿐만 아니라 [[한자문화권]]의 중앙은행의 장은 '[[총재]]'라고 부르는데, 일본의 [[일본은행]]과 대만의 [[중화민국중앙은행]], 북한의 [[조선중앙은행]] 역시 상동하다. 이를 '장'으로 호칭하는 곳은 [[중국]] 뿐으로, 한자문화권 가운데서도 [[중국인민은행]]이 특이한 것이다. * 의외로 미술계의 큰 손이다. 한국은행이 소유하고 있는 미술품만 1,000점이 넘고 총 감정가도 40억원 이상이라고 한다. 주로 1950~60년대에 구입한 작품으로 당시 생활고에 시달리던 무명 화가들의 그림을 구입해 준 것이 현대까지 전해진 것이다. 이 중에는 가격이 크게 오른 작품도 적지 않다. 이 작품들은 한국은행 산하 화폐 박물관에서 상설 전시하고 있다. 비슷한 이유로 [[KDB산업은행]]에도 적지 않은 수의 작품들이 있다. * 매주 금요일마다 직원(초빙 강사도 어쩌다 나온다)을 통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금융시장 전반에 대한 강의를 한다. 해당 강의는 유튜브에 '한은금요강좌'라는 타이틀로 공개된다. * 한국은행에 가보면 시중은행처럼 일반적인 업무를 볼 수 있는 은행이 아니라는걸 알 수 있는데 헌 지폐, 찢어지거나 불에 탄 지폐의 화폐 교환 등이 있다. 따라서 명절이 되면 한국은행은 의도치 않게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는데 "헌 동전으로 바꿔주세요"와 같은 화폐 수집가들의 주화 교환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이 나타난 이유는 1997년 IMF 구제금융 요청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1997년 당시 비교적 액수가 큰 500원 주화가 시중은행을 통해 한국은행에 너무 많이 들어와 쌓인 것이 원인인지 1998년에는 500원 주화를 유통 목적으로 발행하지 않았다. 근데 유통 목적 외에 발행된 동전들마저도 아이들의 군것질이나 다른 기타 목적을 위해 사용돼버렸는지 현재 시중에는 1000개 내외의 수량만 유통 중인 것으로 추측된다. IMF 구제기간 동안 발행된 동전을 찾기 위해 수집가들이 헌 동전을 찾아다니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