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화 (문단 편집) === 1970년대: 한국화라는 용어의 탄생 === 70년대의 시대적인 상황에 있어서 정치적인 변화는 한국 동양화단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다. 박정희 정권은 문화정책적으로 민족문화를 지원했다. 이것은 해방 이후 고대 미술에 쏟은 관심에 비해 현대 동양화에는 제도적인 지원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현실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양화단의 최고 쟁점은 국전 동양화부에서 구상과 비구상 분야의 분리에 관한 문제였다. 이 문제는 특히 동양화의 정체성 문제와도 결부되어서 숱한 논란을 낳았다. 이 대립은 크게 보면 체제순응적이고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기존의 국전, 그리고 국전의 체계를 바꿈으로서 동양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려고 하는 젊은 세대 작가들의 대립이었다. 젊은 작가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묵림회의 동인이었던 산정 서세옥을 들 수 있다. 서세옥은 동양화의 추상을 시도함으로서 산수화 일색의 동양화단에 변화를 꾀하고 이를 통해서 한국 고유의 '한국화'로 나아가자고 생각했다. 이것은 70년대 초기 한국화라는 것이 동양화 전반을 지칭하는 개념이기보다는 기존의 동양화를 대체할 새로운 동양화 또는 전위적인 동양화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했다. 1971년 이경성이 『한국예술지』에 기고한 「미술개관-한국화의 가능성」은 이러한 함의가 있는 한국화에 가하는 비판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동년 『신동아』에 올라온 박용숙의 기고문인 「한국화단 유감 - 한국화의 원류와 개념」에서도 국전과 갈등을 빚었던 미술가들의 자신의 작품들을 한국화로 규정했다. 이 때문에 '한국화'란 용어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주지해야 할 사실은 이 시기 한국화라는 용어 자체가 젊은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한정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였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50년대 김영기의 논의에서도 언급되었듯 한국화라는 용어는 기실 한국에서 그려진 동양회화 전반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 개념은 당시 동양화단의 전반적인 지지를 얻지는 못했지만, 일부 회화에선 그 용어가 언급되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회화를 한국화로 부른다거나 소정 변관식의 회화를 한국화로 소개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당시 한국화라는 용어는 꽤나 중층적인 의미가 있었고, 때에 따라서는 의미들이 상충되기도 했다. 이를 두고 몇몇 미술사가들은 70년대 한국화 논의 당시 평론가들의 부정적인 반응이 이런 용어의 혼재에서 연유하였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1970년대부터 [[유리]]의 대량생산과 서양식 [[액자]]가 보급되면서 가정집에 한국화 액자를 걸어두는 것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한국화 액자는 [[나전칠기]] [[장롱]]과 더불어 2000년대 이전의 가정집을 상징하는 하나의 매개체가 되었다. 지금도 오래된 단독주택이나 오래된 식당에서 종종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