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환상곡 (문단 편집) == 창작과 개작 과정 개괄 == 한국환상곡과 1940년대 만주국 찬양 작품인 만주국 축전곡(혹은 만주환상곡)에 동일한 음악 소재가 쓰인 것을 간파한 이들은 꽤 많았다. 그 중 1990년대부터 안익태 관련 사료 연구를 집중적으로 하고 있는 음악학자 허영한이 [[미국]]과 유럽 각지를 돌며 수집한 신문 기사 등에 기반해 가설을 제시했다.[* 자세한 논문은 계간지 '낭만음악' 2009년 여름호 참조.] 우선 '''한국환상곡'''은 1937년 봄에 미국에서 완성했고, 같은 해 비공식 리허설 또는 시연회를 통해 처음 연주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식 초연은 1938년 2월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작곡자 자신의 지휘로 개최되었고, 이 때 악장 구성은 당시 더블린 신문들의 보도나 비평에 의하면 4악장으로 되어 있었다. 마지막 4악장에는 애국가의 선율이 사용되었지만, 합창단이 부르는 것이 아닌 관현악 만의 연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더블린 공연 후 유럽 본토로 들어간 안익태는 [[헝가리 왕국|헝가리]]의 [[부다페스트]] 국립음악원에 입학했고, 거기서 작곡 지도교수였던 도흐나니 에르뇌의 지도로 한국환상곡을 상당 부분 개작했다. 이 개작판은 6월에 같은 도시에서 안익태 자신의 지휘로 재연되었고, 약 2년 뒤인 1940년 5월에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도 마찬가지로 안익태가 지휘해 세 번째 공연을 가졌다. 하지만 이 시점부터 안익태는 공연 프로그램이나 관련 보도와 비평문에 '에키타이 안' 이라는 일본식 이름의 유럽 어순 독음으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1940년 9월에도 안익태는 부다페스트에서 한국환상곡을 지휘했는데, 이 자리에는 헝가리 주재 일본 외교관들도 있었기 때문에 의도했던 아니건 불쾌감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이 공연 이후 한국환상곡의 연주는 현재 남아 있는 자료들에 의하면 [[제2차 세계대전|2차대전]] 종전 때까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사라진 한국환상곡 대신 1940년 10월 [[불가리아 왕국|불가리아]]의 [[소피아(도시)|소피아]]에서 열린 음악회에서는 갑자기 '''교향 환상곡 제2번 '교쿠토' ''' 라는 곡이 [[갑툭튀]]했다. 일본어로 [[극동]]이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이 곡의 악보는 현존하지 않지만, 신문의 보도 기사나 비평, 공연 프로그램 해설로 미루어 보면 한국환상곡에서 애국가가 연주되는 4악장을 들어내 버리고 3악장제의 곡으로 개작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서도 나머지 악장들에 인용되어 있는 민요들의 소재가 일본이 아닌 한반도임을 명시하고 있었는데, 이마저도 일본의 [[높으신 분들]]이 싫어했는지 1941년 11월 [[루마니아 왕국|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두 번째 '교쿠토' 공연 때는 한국이라는 단어가 [[버로우]]타고 뜬금없이 [[몽골]]의 정경과 민요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소개글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교쿠토' 는 또 1942년에 갑툭튀한 '''만주환상곡''' 또는 '''만주국 축전곡''' 에 밀려 갑자기 연주 횟수가 팍 줄어버렸다. 이 곡의 후반부는 위에 나와 있는 대로 1942년 9월 베를린에서 열린 초연 무대의 동영상으로 남아 있고, 한국환상곡에 나오는 합창부의 선율이 애국가를 제외하면 거의 그대로 들어 있음이 판명되었다. 다만 이 곡은 한국환상곡=교쿠토의 재탕일 가능성이 높으며, 공연 프로그램의 해설을 봤을 때 3악장제의 교쿠토에 만주국 독일 주재 총영사였던 에하라 고이치의 가사에 붙인 새로운 합창부를 후반에 접붙여 만든 개작 작품이라는 것이 허영한의 주장이다. 만주환상곡은 베를린 초연 후 마찬가지로 안익태의 지휘로 [[빈(오스트리아)|빈]](1943.2), [[파리(프랑스)|파리]](1943.3 & 1943.10), [[로마]](1943.5), 부쿠레슈티(1944.2)에서 적어도 5회 가량 재연되었으며, 빈 공연 때는 빈의 제국방송(Reichsrundfunk)에서 방송용으로 녹음을 제작한다는 계획도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녹음이 실현됐는지의 여부는 지금도 불확실하다).[* 다만 녹음을 했다고 하더라도 1945년 1~2월에 걸친 빈 폭격으로 방송국 건물이 매우 크게 훼손되어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이 만주환상곡도 결국 효력을 급히 상실했다는 것이었다. 1943년 11월에 안익태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연주회를 가졌을 때는 또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교향 환상곡 '토아' ''' 라는 작품이 연주되었다고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동아(東亞)의 일본어 독음인 '토아' 라는 제목의 이 작품도 '교쿠토' 나 '만주환상곡' 처럼 완전히 신곡이 아니라, 만주환상곡에서 종반부 합창을 생략한 관현악곡으로 여겨진다. 허영한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한국환상곡이나 교쿠토나 만주환상곡이나 토아나 전부 같은 작품을 외적인 요인에 따라 개작한 곡이라 본질적으로는 같은 곡이라는 말이 된다. 다만 이러한 추측을 사실로 입증할 만한 자필 악보나 녹음 자료, 녹화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언제든지 뒤집힐 수도 있는 가설이다. 어쨌든 안익태가 2차대전의 포화 속에서 유럽 활동을 하기 위해 꽤 복잡한 보신술을 구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고, 나라 없는 식민지인의 신세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환상곡이 1940년 9월 부다페스트 공연 뒤 제대로 된 제목으로 다시 등장한 것은 1944년이었는데,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뒤이은 유럽 본토 진격으로 전황이 완전히 추축국의 패배로 정해진 시점에 스페인으로 피신한 뒤였다. 바르셀로나에서 완성된 이 악보가 현존하는 한국환상곡의 가장 오래된 악보이며, 이 악보에 의한 공연은 1946년 3월에 리세우 극장에서 안익태 자신의 지휘로 행해졌다. 이 때의 곡 구조는 교쿠토처럼 3악장제였지만, 후반부에 다시 애국가 선율이 복원되었다. 이 1944년판 악보는 이후 여러 차례 개작 또는 개정되었고, 만주환상곡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선율은 1950년대 중후반을 전후해 재탕된 것으로 보인다.[* 안익태의 자작자연으로 녹음된 1960년대 실황녹음에서 이 대목이 분명하게 들려오고 있고, 현재까지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전후의 한국환상곡 개작과 결정본 성립 과정도 논란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현재 연주되고 있는 한국환상곡의 악보는, 안익태 사후 남겨진 자필보들에 근거해 작곡가 정윤주가 사보한 것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정윤주 사보본은 악장 구별 없이 전곡이 계속 연주되고 있고, 애국가는 이행부 등 텀을 두고 두 차례 불려진다. 이것이 단순히 최종 정리된 원고를 사보만 한 것인지, 여러 차례 행해졌던 개정 작업의 결과 나온 이본들을 짜맞춘 것인지, 아니면 정윤주 자신의 개작이나 첨삭이 가미되어 있는 지는 미지수다. 이러한 온갖 논란들의 결과로 [[21세기]] 기준으로는 막상 대한민국 내에서 거의 연주되지 않는 곡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만 [[애국가]]의 선율이 깔리는 합창 부분을 10분 내외로 발췌한 버전은 틈틈이 연주되기도 한다.] 한국환상곡이 다름 아닌 [[애국가]]의 오리지날 버전, 혹은 풀 버전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실로 아이러니한 일.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2021년]] 기준 인터넷에서 제일 쉽게 찾을 수 있는 영상도 한국에서 제작된 영상이 아니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작된 영상이다. 오히려 국내 영상을 찾아보기가 극도로 어렵다.[* 게다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작된 영상도 애국가 부분을 4절까지 불러야 하는 악보상의 지침과 달리 애국가를 1절까지만 부르고 있어서 엄밀히는 상당히 축약된 버전을 연주하고 있다.] [각주] [[분류:일제강점기]][[분류:한국 음악]]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