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글/역사 (문단 편집) ==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까닭 == 한글을 창제한 까닭이 무엇인지는 한국어학계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문제이다. 한 예로 한글 창제 이후로는 양반들이 [[한문]]을 공부할 때, 한국어와는 체계가 다른 한문의 구절마다 한글로 된 토를 달아서([[현토]]) 훨씬 배우기 쉽게 하는 등 '''양반들에게도 무척 유용'''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기록을 보면 [[남구만]]이라는 관료가 '식년시가 구송(입으로 위우는 것)만 시키니 시골동네에선 어려서부터 언문(한글)으로 토를 달고 공부하는 바람에 막상 과거에는 합격해도 편지 한 장 쓸 줄을 모른다'라고 한탄한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양반은 한문을 배울 기회가 없는 부녀자[* 예컨대 양반 집안의 여자 어른.] 및 평민들[* 드물지만 토지매매 계약서 같은 것.]과 글로 소통할 필요성이 있었고 [[천자문]]같은 기초교육교재도 한글로 음을 달거나 뜻을 풀이하는 식으로 출간하였기 때문에 당대의 식자층이라면 기본 소양으로 한글을 모두 알고는 있었다. 물론 연암 [[박지원(실학자)|박지원]]처럼 끝내 한글을 배우지 못했던 사람도 있었다. 실제 조선시대에 쓰인 한글은 글 읽기보다 생계에 바빴던 평민층에 비해 오히려 양반 부녀자층이나 중인층에게 유용하게 쓰였으며, 특히 실질 행정 실무를 담당했던 중인층에게 유용했다는 점에서 통치 체제 강화에 적지 않게 일조하였음이 눈에 띈다. 내명부 최고위층(대비, 중전)들의 언문교지나 [[http://sillok.history.go.kr/id/krb_200001|현종의 유시를 백성들이 언문으로 번역해 돌려보던]] 것처럼 공식 통치행위에서도 언문이 곧잘 사용되고 있었는데, 대비나 중전이 자지(慈旨)를 내린 것부터가 고려시대에는 전례가 없던 일임을 생각하면 이러한 변화에 한글의 지분도 적지 않게 평가할 수 있다. 세종이 오로지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지었다면 정작 그의 치세에 한글로 번역되거나 반포된 책들이 《월인천강지곡》 같은 불교언해나 이성계의 역성혁명(실패했으면 빼도 박도 못 하는 [[쿠데타|역모]]다)을 정당화하는 《[[용비어천가]]》 등의 책들 말고는 왜 그다지 주목할 만한 것이 없는지도 고려해 봐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훈민정음》의 주된 창제 사유를 통치 체제 강화에서만 찾는 것은 [[발생적 오류|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 채 판단하는 오류이다]]. 애초에 양반들을 비롯한 지배층의 편의성이 주된 사유였다면 만들 때 반포 사유로도 그것을 내세우는 편이 훨씬 설득력 있고 반대에 부딪힐 확률도 훨씬 줄어든다. 물론 최만리와 같은 보수파는 이조차도 '''"이미 이두 잘 쓰고 있는데 언문이 왜 또 필요함?"'''이라며 반박했다. 더욱이 훈민정음의 창제는 이후 양반 지배층 이외의 계층들 사이에서도 문화를 꽃피우는 근본이 되었다는 점에서 단지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 세종의 궁극적 의도가 이룩됐다고 볼 수 있다. 최만리의 상소 사건 때 세종이 정창손을 콕 집어서 '''"넌 삼강행실도를 언문으로 번역해도 효자 열녀가 안 나온다니 그게 선비라는 놈이 할 소리냐?"'''라고 갈구면서 오히려 언문을 통해 충신, 효자, 열녀가 무리로 나올 것이라고 말한 걸 보면 이미 반포 당시부터 일반 상민층을 대상으로 하는 언문 번역사업은 구상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의 통치철학인 유학의 이상인 '만민이 가르침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즉 신분여하를 따지지 않고도 가르침을 통해 군자가 될 수 있단 것을 세종이 보다 쉬운 문자인 훈민정음을 통해 구현하려 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세종은 정창손을 보고 성리학자로서, 그리고 성리학을 통달했으니 이를 가지고 사람들을 계몽시키도록 정치를 하게 뽑은 관리로서도 실격이란 말을 한 것이며 실제로 이 후 정창손은 파직된다. 일본의 언어학자 노마 히데키는 저서 《한글의 탄생》에서 당대 조선에서 사용되던 기록은 모두 붓을 사용하여 한자로 쓰인 것이었음을 지적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붓]]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붓으로 글씨를 쓸 때에 생기는 획의 삐침이나 획 사이의 여백, 그리고 글씨를 이어서 쓰는 연서 등은 필연한 것이자, 동시에 글씨의 형태를 완성할 때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자는 연필 등의 다른 필기구로 쓰이지만 이러한 삐침은 사라지지 않고 획에 포함되어 유지되고 있다. 만일 사대부들의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해서 글씨를 만들었다면 당연히 그들이 사용하는 필기구인 붓을 사용할 것을 전제로 자형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자모만큼은 그러한 삐침 등이 완전히 생략된, 다시 말해 나뭇가지와 같은 원시적 도구로도 충분히 쓸 수 있는, 선과 네모, 원으로 이루어진 간결함의 극치를 보인다.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붓을 쓰던 시대에 훈민정음은 자형을 만드는 단계에서 이미 [[붓]]을 쓰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만들어졌다. 노마 히데키는 훈민정음의 극도로 단순한 모양은 붓과 먹, 종이 같은 필기 도구를 살 형편이 안 되는 백성들까지도 문자를 쓰게 될 것을 [[배려]]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측했다. 저자의 말을 덧붙이면... >'훈민정음은 어리석은 백성이 모래 위에 나뭇가지로 낙서하듯 그리기에 어려움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참고로, 훈민정음에 연서와 삐침이 등장한 것은 창제 후 수 세기가 지나고 [[궁체]]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이와 비슷하게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많은 문자들이 대개 복잡하면서 장식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실용성만을 고려하여 장식성을 완전히 배제한 초창기 훈민정음의 모양은 어떻게 보면 당대의 서체 미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전위적인 형태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거의 근대 [[모더니즘]]을 연상케 한다. 즉 세종이 한글을 만든 가장 중요한 이유는 《훈민정음》 서문에도 잘 나와 있듯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펼칠 수 없는 '''백성들'''을 위해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