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글/역사 (문단 편집) == [[연산군]]의 훈민정음 탄압 == 연산 10년(1504) 7월 19일, 연산군의 처남이 되는 신수영(愼守英 ?-1506)에게 웬 사람이 찾아와, 자신이 이규(李逵 1454-1505)의 심부름꾼이라고 하면서 서찰 하나를 전해주었다. 신수영은 서찰을 연산군에게 은밀히 올렸는데, 연산군이 읽어보니 자신을 비방하는 언문(한글) 투서였다. 내용은 몇몇 [[의녀]]들이 모여서 "우리 임금이 신하들 죽이기를 파리 잡듯이 하고 여자를 밝히니 반드시 화가 있으리라."라고 말했으니 벌하라는 것이었다. 연산군은 투서의 내용에 노하여 다음날(7월 20일) 도성의 문을 닫고 투서자를 추적하며 투서에 언급된 의녀들을 국문하였다. 그런데 막상 조사해보니 의녀들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며, 이규 또한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하였다. 누군가 자신을 감추고 이규와 의녀들의 이름을 팔아 연산군에게 욕을 한 것이다. 그러나 끝내 진범은 잡히지 않았으며 억울하게 고초를 겪은 사람만 늘어났다. 또한 같은 날에 한글 사용을 전면 금지하고 쓰거나 배우는 자는 무조건 체포하며, 이런 사람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같이 벌하라고 명령하고, 관련 서적은 소각하도록 하였다. 그 외에도 일일이 한글 아는 자를 추려 투서와 필적을 비교하여 찾아내도록 하였다. 하지만 훈민정음은 이미 세종대왕의 확고한 업적으로 민간에 자리잡았는데 이를 억압하였으니 연산군의 행동은 곧 [[패륜|조상이자 선대 왕인 세종대왕의 업적을 모독]]하여 그 포악성이 만대에 드러났음을 알리는 사례이기도 하였다. 세종대왕은 연산군의 고조부이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고조부까지는 제사를 지내는 집들이 많았다. 딱 '''[[고조할아버지|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인데 엄청나게 가까운 '''직계 조상'''이다.[* '4대조'이지 '4촌'이 아니다. 직계 조상과는 촌수를 세지 않는다.] 연산군도 처음 분노했을 때는 모든 한글을 없애버릴 기세였지만 노기가 조금 가라앉자 자기가 생각해도 아니다 싶었는지 명령을 내리고 이틀 만에(7월 22일) "언문을 쓰는 자를 벌하고 언문으로 [[구결]]을 단 책을 불사르되, 한문을 언문으로 번역한 책 따위는 내두라." 하고 슬쩍 숨통을 열어주었다. 언문을 금지한 지 반 년도 되지 않은 12월부터 연산군 본인이 언문으로 번역하라고 지시한 전교가 수두룩하다. 연산군이 놀기 위해 만든 흥청의 음악교본도 언문으로 제작되었다. 진지하게 언문을 탄압할 생각이 아니라 홧김에 내린 명령이라 은근슬쩍 철회한 듯하다. 언문으로 번역하라는 전교가 다른 역대 조선 왕들보다도 많기 때문에, 하교한 것만 보면 오히려 한글을 장려했다고 보일 정도다. 그런데 연산 11년(1505) 5월에는 겸사복(일종의 왕궁 호위무사) 한 명이 첩에게 언문 편지 한 통 썼다고 의금부에서 잡아들였다. 연산군 본인은 반 년 전에 역서를 언문으로 번역하라고 지시해놓고는 갈팡질팡했다. 과연 연산군답다. 아무튼 연산군 시기 한글 탄압 정책은 스스로도 지키지 않으니 시간이 조금 지나자 어느새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