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미관계 (문단 편집) ==== [[전두환 정부]] ==== 여기서 한국 내 [[반미]] 운동에 큰 영향을 준 것이 [[12.12 사태]]와 [[5.18 민주화운동]]이다. 노태우 정권 이전까지 [[대한민국 국군]]의 전시, 평시 [[작전통제권]]은 [[한미연합군사령부|한미연합사]] 아래 있었다. 물론 [[북한의 대남 도발사|북한의 대남도발]]에 대응하는 것과 같은 긴급사태에는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지만 12.12, 5.18은 전혀 그런 사건이 아니었다. 북한의 개입이 없었음에도 [[신군부]]가 멋대로 전방 9사단의 병력을 쿠데타에 동원하였는데, 이는 한미연합사가 가진 작통권을 무시한 명백한 월권행위였다. 이후 5.18 때 미국이 20사단의 이동을 허가한 것이 알려지자 사태가 더욱 심각해졌다. 작통권의 최상위에 있는 한미연합사로 인해, 미국에서는 얼마든지 전두환과 신군부에 책임을 물을 수 있었고, 명백한 협정위반에 대응하는 것이기에 내정간섭에 속한다고 보기 어렵다. 5.18같은 경우, 외신으로 인해 서방권에서 사태의 진상을 알고 있어 명분 자체도 충분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냉전과 카터 정권 말기라는 상황 아래, 박정희 정권 당시 진행되었던 핵개발을 백지화하고 반공을 주장하며 미국에 저자세로 일관하던 전두환을 인정해버리고 만다.[* 대신 구금된 김대중을 신군부가 처형하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하고 미국 [[망명]]을 주선하기는 했다.] 한국 문제에 있어 결국 미국은 자국의 국익을 타국보다 우선한 셈이 되었고,[*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에 대한 [[지미 카터]] 행정부의 온도차는 너무나도 컸다. 박정희에게는 독재, 핵개발을 사유로 들며 주한미군 뺀다는 소리까지 하던 카터가 정작 신군부의 만행은 방조하거나 심지어 도와주는 모습(20사단 이동 승인)까지 보였다. 결국 '인권, 민주화같이 좋은 말만 하더니 결국 제 이익 챙기려 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정작 전두환에게 힘을 실어주며 전두환을 좋아하는 것 같더니 6월 민주항쟁에서 전두환을 완전 날려버린 [[레이건]]과는 정반대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 결과 한국인이 가지고 있던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의 화신'이라는 인식이 크게 훼손되었다. 그 결과 유의미한 반미 기조가 발생하였고, 결국 6월 민주 항쟁에서 미국은 [[6.29 선언]]을 종용하고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을 지지하기도 했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77007|KBS]],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9740_19322.html|MBC]] 자료 참고.] 직선제가 16년만에 처음으로 치뤄진 1987년 [[13대 대선]]에서 미국은 대놓고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는 논평을 내서 국내의 혐미감정을 자극하기도 했다.([[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76981|KBS]],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9666_19322.html|MBC]]) 1990년대 초반까지 NL계 지식인들의 당시 견해를 들어 보자면, 4.19 때 이승만 [[하야]]나 [[10.26 사태]], 6.29 선언 등에서 보듯 한국 독재자 퇴진은 미국 CIA의 '타겟 바꿔치기 전술'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참고 자료: <진단 제6공화국> - 이한열기념사업회 저. 두리. 1991. p226~229. 그 외에 이성광 저서 <민중의 역사> 하권에도 몇 번 언급됐다.] 휴전 이후에도 미국이 한국의 정치나 사회에 개입을 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주한미군사령관]]이 [[5.16 군사정변]]을 저지하려는 시도와 [[김대중 납치 사건]]이나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서 김대중을 살해하지 못하도록 전두환정권을 압박하고 [[6.10 민주 항쟁]] 당시 군대투입이나 강경진압에 반대를 표하며 대신에 6.29선언을 종용하며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을 지지한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77007|KBS]], [[https://imnews.imbc.com/replay/1987/nwdesk/article/1799666_29505.html|MBC]] 자료 참고.] 이는 같은 친미국가인 이웃 국가 일본과 대조된다. 미국이 한국 전쟁 종전 후에 한국에만 개입을 하고 일본에는 딱히 개입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일본은 2차 대전 패전 직후에 미국이 일본을 친미 민주주의 국가로 완전히 뜯어고쳤고 거기서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일본이 독립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일본은 [[도조 히데키]] 정권을 끝으로 독재정권이 완전히 종식되었다.] 반면 한국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과 연합군이 [[압록강]]에 진출해 북진통일이 눈 앞에 들어오는 찰나에, 중공의 북한개입 때문에 실패로 돌아섰다. 이후에 어수선한 상태에서 휴전 협정을 했으며, 휴전 직후 전쟁 폐허로 심각하게 빈곤하였으며, 이로 인해 당시 한국 국민들에게 민주화 의식이 미약했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독립한 신생국들은 전부 해당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식민제국|식민열강들]]은 의도적으로 교육을 하지않고 사회구조는 왕조시절이나 별다를 바 없던 전근대적으로 멈추어 있던 상태에서 출발하였다. 이러니 곧바로 서구식 민주주의를 도입한다 해도 거의 대부분 [[권위주의]]나 독재정치로 흘렀고, 국민의 정치자유 및 형식적 민주주의가 발달한 소수의 나라에서도 소수 엘리트가 움직이는 유사 민주주의로 흘러갔다. 이런 나라들에 비하면 한국은 그나마 상황이 좋게 흘러갔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은 무엇보다 근대화를 100년 이상 경험하였고 미약하게나마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경험하는 등 사회는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선진적이었다. 미국이 일본의 경우 [[연합군 점령하 일본|GHQ]] 이후 완전한 민주주의가 정착했으니 너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고 한국은 관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일본과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을 단기간에 완전히 뜯어고쳤다. 다만 독일은 전쟁 직후 분단이 되었으니, 미국과 소련이 양분하여 개입이 있었긴 하지만, 한반도에 개입한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약했다.] 한국의 군사독재가 종식된 80년대 이후부터는 미국에서도 이전처럼 한국의 정치나 사회에 과도한 개입은 자제하는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