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불관계 (문단 편집) === 조선 === [[프랑스]]는 [[대한민국]]과 외교관계를 맺어왔던 [[서유럽]]의 국가 중 사실상 최초로 한국과 외교 접촉을 하였다. 1835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피에르 모방|모방 나 베드로]] [[신부(성직자)|신부]]가 처음 조선 땅을 밟은 것을 계기로 이후로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 [[주교]] 등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사제]]들이 잇따라 방한하였다. 이후 1851년 프랑스의 [[포경선]] 나르발호가 [[나주]] 비금도에 표류해오자 자국 선원을 구출하고자 온 프랑스 영사 '몽티니'가 직접 나주목사와 만나게 되어 최초의 외교적 접촉이 이루어졌다. 해당 회담에서는 [[막걸리]]와 [[샴페인]]을 서로 교환하기도 했다고 한다. [[https://www.google.co.kr/amp/s/amp.seoul.co.kr/seoul/20230828500218|#]] [[https://youtu.be/esBTZCudXFo?si=EUIiaTsiu3TvuZIu|#]] [[파일:external/info.catholic.or.kr/%ED%95%9C%EA%B5%AD%EC%9D%98%ED%8C%8C%EB%A6%AC%EC%99%B8%EB%B0%A9%EC%A0%84%EA%B5%90%ED%9A%8C%EC%88%9C%EA%B5%90%EC%9E%90.jpg]] ||조선에서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프랑스인 사제들|| 그러나 서양에 매우 보수적이고 반감적이며 특히 [[청나라]]에 우호적이었던 [[조선]]의 외교적 정서 때문에 [[조선의 천주교 박해|천주교를 박해]]했다.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 순교성지|한강변의 새남터]]에서 순교했고, 1866년 [[병인박해]] 때는 무려 9명[* 베르뇌 장 시메온 주교(서울대교구 제4대 교구장),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서울대교구 제5대 교구장), 푸르티에 신 요한 신부, 프티니콜라 박 미카엘 신부, 위앵 민 루카 신부, 오매트르 오 베드로 신부, 브르트니에르 백 유스토 신부, 도리 김 헨리코 신부, 볼리외 서 루도비코 신부]의 [[프랑스인]] [[사제]]들이 새남터와 [[http://galmaemot.or.kr|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그러자 [[프랑스]] 정부는 자국 군대를 동원하여 '''[[병인양요|조선 침공]]'''을 강행하였다. 이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척양(斥洋) 정책]]이 더욱 강화되었고, 양국의 관계는 멀어진 듯 싶었다. 이때 '''[[외규장각]]''' 도서를 도난당했다.[* 이거 때문에 현대에는, 당시의 프랑스인 선교사제들을 [[제국주의]]의 앞잡이 취급하는 시선이 존재한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인 선교사제들이 본의 아니게 [[병인양요]] 등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맞지만, 이들의 선교 자체가 제국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이들이 한 행동은 간첩질이라기보다는 "본국에 도와달라고 하자"에 더 가깝기도 하고. 물론 이러한 행동이 본의 아니게 끔찍한 결과를 불러왔다.] [[김옥균]]을 죽인 [[홍종우]]는 [[프랑스]]에 유학했고(최초 사례), 그 때문에 [[춘향전]]과 [[조선]]의 역사에 대한 개략을 최초로 [[프랑스어]]로 번역해 내기도 했다. 그가 [[대한제국]]이 지향해야 할 이상국가 모델 역시 [[나폴레옹 3세]] 시기의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였다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1876년 [[일본]]이 [[강화도]]에 [[일본군|자국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강화도를 습격하여 [[강화도조약|불평등 조약]]까지 맺게 되고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면서 마침내 '''[[1886년]] [[6월 4일]] [[조불수호통상조약]]'''[* 이때부터 한국에서도 [[가톨릭]] 포교와 [[종교의 자유|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다.]이 체결됨에 따라 양국 관계가 복원되기도 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로 인하여 다시 [[단교]]되지만 한불수교는 [[조선]]과 [[프랑스 제3공화국]]이 체결한 이 조약을 기점으로 체결된 것으로 판단, 현재는 한불수교 제 [age(1886-06-04)]주년이다. [[광복]] 이후에는 1949년에 관계가 복원된다. [[1880년]]에는 [[펠릭스 클레르 리델]][*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 주교에 의해 최초의 한불사전인 [[한불자전]](韓佛字典)이 편찬되었다. 또한 1888년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프랑스인 수녀들이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한다. 한편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때 순교한 프랑스인 사제들은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때 [[시성]]되었다([[한국 103위 순교성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