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성백제 (문단 편집) == 역사 == [[백제]]가 [[온조왕]]에 의해 건국되었을 때부터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에 의해 [[개로왕]]이 전사하고 [[문주왕]]에 의해 공주의 [[웅진성]]으로 천도하기 전 [[위례성]]에 도읍했던 시기의 백제를 뜻하는 명칭이며, 지금의 [[풍납토성]] 안의 모 아파트 뒷쪽 부지를 위례성 시기 평시 수도, [[몽촌토성]] 일대를 전시 수도로 추정한다. [[마한]]의 수십개 거수국 중 하나였던 백제가 [[목지국]]을 쓰러뜨리고 마한의 새로운 [[맹주]]가 되어가던 시기로, [[근초고왕]] 최전성기 무렵엔 북으로는 371년 [[평양성 전투(371년)|평양성까지 쳐들어가]] 고구려 [[고국원왕]]을 사망시키고, 남으로는 왜국에 [[칠지도]]를 선물할 정도의 위용을 보였으나, 475년 [[장수왕]] 군대에게 역으로 [[위례성]]을 함락당하고 [[개로왕]]이 사망하면서 막을 내린다. 좀 더 정확하겐 [[개로왕]] 사망 이후 개로왕의 바로 아래 동생 [[문주왕]]이 지원군으로 끌고 온 백제-신라 연합군의 비호 아래, 고구려군이 한강 너머 바로 북쪽 코앞에 있는 상황에서도 어쨌든 풍납토성에서 정식 즉위식은 거행했고, 천도도 바로 쫓기듯 내려온게 아니라 폐허가 된 위례성 궁성 자리에서 적어도 한달 정도는 위치를 심사숙고했고, 이후 오늘날 [[공주시|공주]] 지역에 천도하기로 결정하면서 궁실과 조정이 완전히 피폐해지진 않은 웅진백제를 이끌 수 있었다. 허나 한성에 비해 지역적 기반도 약했고 고구려에 대패한 왕실의 입지도 크게 줄어들었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웅진성으로 천도한 이후 백제 왕권은 한성 시기에 비해 크게 약해지고 만다.[* [[일본서기]]에서는 이 시기에 일시적으로 백제가 망한 걸로 기록했을 정도였다. 실제 한성백제는 이때 망했다. 어떻게 보면 [[제4차 십자군]]의 침략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어 일시적으로 [[동로마 제국]]이 망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기존의 제도와 관행도 무너졌기에 한동안은 지역 세력가들이 군사력만으로 정치적 의사를 관철시키기 쉬운 환경이 되었다. 501년 [[무령왕]] 즉위 전까지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등) 왕이 무려 3명이나 암살되거나 암살당한 듯한 기록이 나오는 만큼, 이후 백제는 정치적으로 꽤 혼란스러운 시절이 한동안 이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