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성정부 (문단 편집) == 개요 == [[3.1 운동|기미 독립선언]] 이후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경성부]]에서 조직된 임시정부로, 1919년 4월 23일 24인의 13도 대표자들이 [[자유공원|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 국민대회를 열어 <국민대회 취지서>를 발표하고, <임시정부 선포문>을 선언함으로써 수립되었다. 13도 대표들은 선포문에서 “3 •1 민주혁명을 바탕으로 국민대회를 조직하고, 본 대회는 민의에 기(基)하여 임시정부를 조직, 약법(約法)을 제정하여 이를 선포한다”고 밝혔다. 당시 미국 최대 통신사인 UP통신(UPI통신의 전신)은 한성정부 수립을 전 세계에 타전했다. [[파일:external/www.loverokorea.org/2.4.jpg]] 한성정부에서 대내외적으로 내세운 국호는 대조선공화국(大朝鮮共和國)이었다. [[민주공화제]]를 국체로 삼았으며, 국가원수는 집정관총재(執政官總載)였다.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에 추대되었다. 1919년 5월 31일 [[신흥우]]에게서 한성정부 수립의 문건을 건네받은 이승만은 6월 14일부터 '''President of Korea'''라는 직함이 새겨진 명함을 이용하여 대외활동을 시작했다. [[안창호]]는 이 'President'를 '대통령'으로 이해하여 이승만에게 아래와 같은 서신을 보냈다. >상해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이고 한성정부는 집정관총재 제도이며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가 대통령이 아닙니다...(이하 생략)...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세를 하시면 이는 헌법 위반이며, 정부를 통일하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 행세를 하지 마시오. > - 1919년 8월 25일 안창호의 서신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 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언급하지 마시오. > - 1919년 8월 26일 이승만의 답신 이 일화를 두고 이승만이 대통령 직함 사용에 집착했다고 하거나, 심지어는 '대통령 참칭'이라고까지 규하려는 주장이 있는데 이승만은 '집정관총재'라는 단어를 영어로 번역하려면 president가 적절하다고 생각하여 영어 명칭으로 president를 썼을 뿐 한국어 명칭을 '대통령'이라 한 적은 없다. 당시 한성정부의 수장은 집정관총재였고 그 밑에 국무총리는 별도로 존재했다. 그러므로 집정관총재에 prime minister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나마 가장 적절한 표현이 president였던 것. 결국 1919년 9월 안창호의 주도로 통합된 상해 임시정부가 탄생되는데, 이때의 대통령은 이승만, 국무총리는 이동휘가 된다. 이승만의 직책변화를 살펴보면 1. 19년 4월 13일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승만 2. 19년 4월 23일 한성정부 집정관총재 이승만 (안창호와 이승만의 서신 이후) 3. 19년 9월 통합된 상해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기치를 내걸고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중국]] [[상하이]]의 [[상해임시정부]]도 설립되었는데, 분산되어 있을수록 항일투쟁이 힘들다는 의견이 모아져서 서로 통합을 계획하게 된다. 1919년 9월 11일 이들과 통합해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되었으며, 위치나 과정상 상해임시정부가 중심이 됐지만 명목상의 법통은 한반도 내에 있던 유일한 정부였던 한성정부를 계승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비유하자면 A(상해 임시정부)와 B(한성정부)라는 두 기업이 인수합병을 하여 통합회사 이름을 A(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하는 대신, 사장은 B쪽(한성정부의 이승만)이 맡은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