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일관계 (문단 편집) ==== 조선 전기 ==== [[무로마치 막부]]가 지방 세력들을 제압한 후 한일 관계는 교린 관계로 그럭저럭 평온하게 유지되었다. [[변효문]]과 [[신숙주]] 등이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세종(조선)|세종]]의 대마도 정벌 이후 15세기 중후반에는 왜구가 한반도를 노략질하는 일은 줄어들었다. 조선이 15세기에 이르러 외교적 안정과 평화를 맞으면서 내치에 집중했던 반면, 일본은 [[오닌의 난]]이 발발하여 [[무로마치 막부]]가 통제력을 잃고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각자도생을 꾀하던 일본의 지방세력 중 서일본의 세력일 수록 경제적 이익을 구하여 조선과의 교류에 힘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 해에 일본에서 건너온 사절단이 6,000여명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활발하였다. 이들은 조선 정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저자세를 취하여, 조선을 '상국'이라 부르고 국왕을 '황제 폐하'라 칭하는 등[* 세조와 성종 대의 외교문서에서 빈번하게 발견된다.] 몸을 낮추었으며, 조선 역시 일본에 대한 우월의식을 확립할 수 있었다. [[세조(조선)|세조]]는 "[[여진족|야인]]과 [[일본인|왜인]]은 모두 우리 번리(藩籬)이며, '''우리의 신민'''이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조선 지배층들의 일본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통교는 작고 큰 참화를 불러오기도 했는데, 16세기에 [[삼포왜란]], [[을묘왜변]]이 발생하여 조선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면서 이전의 일본의 저자세가 사라져서 조선 정부로서는 크게 당황하였으며, 그가 일으킨 '''[[임진왜란]]이라는 전면전까지 발발'''했다. [[선조(조선)|선조]]가 수도 한성을 버리고 북으로 피난을 나서고, [[명나라]]의 손을 빌려 간신히 일본을 패퇴시키는 등 이 과정에서 많은 이가 [[일본/군사사|일본군]] 또는 [[전염병]]으로 죽거나 다치고 국토도 황폐화되었다. 당연히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군대를 보내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조선 측에서는 새로운 승리자가 된 그와 적대를 할 이유가 없어 [[광해군]]1년인 [[1609년]] 빠른 관계 회복을 원했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멋대로 국서 바꿔치기 주작을 하였지만 어찌 되었든 [[기유약조]]를 맺어 국교를 재개하게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의 마지막 막부 정권인 [[에도 막부]]를 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