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일관계 (문단 편집) === [[8.15 광복]] 이후 === 1945년 [[태평양 전쟁]]의 결과로 광복을 맞은 조선에서 일본에 대한 감정은 역대 '''최악'''이었다고 보면 된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친일파 청산을 위해 조직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자신의 정권장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방해하다가 결국 친일파 청산이 완료되지 못한 채 해산당해 훗날 좌파 진영에게서 친일파 소리를 들어먹게 되었지만 사실은 [[대한민국 대통령]]을 통틀어 가장 대외적으로 강경한 대 일본관계를 유지하였다. 본인부터 [[독립운동가]] 출신이기도 하고. 이승만 정권은 해방 과정에서 다소 애매한 위치에 놓인, 오늘날까지도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는 [[독도]]를 일본이 [[연합군 점령하 일본|미군정]]의 통치로 인해 손을 쓸 수 없는 틈을 노려 수복하였다. 다만 애매하다는 말은 한반도 및 부속 도서로서 한국이 돌려받았는가, 아니면 연합국 군정의 점령지로 남았는가의 문제일 뿐, 행정구역에서 제외당한 일본 정부가 엉뚱하게 가타부타 뭐라 할 여지는 전혀 없다. 미국이 독도를 요구한다면 모를까. 결과적으로 독도를 한국이 실효지배함으써 독도 분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지만 동시에 일본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이를 가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6.25 전쟁]] 당시 미군정 치하의 일본이 경찰예비대(구 [[일본군]], 지금의 [[자위대]])를 파견하려 하자, 이승만은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면 총부리를 [[북한군]]에서 일본군으로 돌리겠다는 발언을 해서 '''대놓고''' 파견하지는 못했다.[* 비공식적으로 일부 파병하기는 했다.] 낙동강 방어선까지 몰려가면서 대한민국 멸망 직전의 상황까지 왔음에도 일본에 대해서는 여전히 초강경으로 나섰다. 1953~1956년 사이에 일본 [[해상보안청]]이 [[독도]]에 대한 무단침입을 시도했고 [[1954년]]에는 [[독도대첩]]으로 사상자까지 발생할정도의 무력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승만 정부 시절에도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해 보상금을 받아 경제발전에 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일제의 피해로 22억 달러의 손실을 당하였다며 이를 청구하였으나 일본은 근거가 없다며 한국에 남겨진 일본인 재산을 돌려달라는 역청구권까지 제시하며 거절하였다. 1953년 10월 회담에서 일본의 대표 구보타 간이치로는 일본의 한국 지배는 유익한 것이었으며 일본이 아니더라도 중국이나 러시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발언하였다. 당연히 회담은 결렬되었다. 1957년 일본은 이 발언을 취소하고 다시 회담이 열렸지만 1959년 일본 정부가 [[재일 한국-조선인]]을 북한으로 송환하자 일시 중단되는 파국을 면할 수 없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장면 정부가 들어서고 회담이 개최하였지만 지지부진하였고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일 관계는 새 국면을 맞는다. 조속한 경제성장이 절실했으나 돈이 없었던 한국과 미국의 강력한 요구, 그리고 과거 문제를 청산할 필요성이 있었던 일본 정부의 이해관계 일치로 인해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유무상 8억 달러를 받았고, 일본은 표면적으로나마 과거사 문제를 완전히 청산할 수 있었으나, 내부적으로는 과거사와 해당 조약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발생해 한일관계가 꼬이는 원인을 제공하고 만다. 과거사 문제를 비롯해 정치적 문제까지 겹친 박정희정부 시절 일본과의 관계가 다시 끊어질 뻔한 초대형 사건이 터졌다. [[조총련]]을 위시한 재일 한국인(조선인)들 간의 이념적 갈등으로 인한 문제,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크게 항의를 받았으며 이듬해 [[민청학련 사건]]에 일본인 2명이 구속되었고 북한-일본을 왕래하던 만경봉호에 승선해 북한의 공작지도원과 면담을 하는데 남조선 대통령 암살은 김일성의 명령인 혁명과업으로 성공해야 한다며 당부하고 이에 주석 님의 혁명 과업을 위해 기필코 성공하겠다고 대답한 [[재일 한국-조선인]] 문세광이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29회[[광복절]] 기념행사장에 난입해 영부인을 암살한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노신영 외무차관은 다음 날인 16일 주한 일본 대사를 소환해 문세광에게 일본인 명의의 여권을 발급한 데 대한 공식 해명을 요구하는 동시에 김호룡 당시 조총련 오사카지부 정치부장 등 일본 내 공범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으나 일본의 수사가 정부가 기대한 것에 미치지 못하고 일본 내에서는 내정간섭을 받고 있다는 여론이 조성되어 당연히 국내에는 반일 여론이 거세졌고, [[주한일본대사관]]주변에 매일 같이 시위대의 항의집회가 벌어지고 자칫하면 흥분한 이들에게 점거당할 수 있어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는 데모 대의 대사관 접근 금지 조치를 내렸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09060032920101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09-06&officeId=00032&pageNo=1&printNo=8907&publishType=00020]].] 이러한 때 한국 정부는 [[을미사변]]을 파헤쳐 공론화할 것을 지시하며 일본과의 단교까지 고려한 것으로 밝혀졌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2&aid=0000031574|'박 대통령 저격' 배후 수사 한·일 첨예 대립]] 이러한 사태는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이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당시 외무장관을 맡았던 시나 에츠사부로를 특사로 파견해 일본의 책임 인정과 한국 수사기관과 협조한다는 내용의 친필을 전달해 일단락되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091900329201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09-19&officeId=00032&pageNo=1&printNo=8918&publishType=00020]].] 1980년의 [[5.18 민주화운동]]과 이후 계속된 사회적 혼란은 일본인들에게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를 두고 당시 일본인이나 일본 언론들은 한국을 보고 "식민지 통치 시기가 더 행복하지 않았느냐" 식의 망언을 할 정도로 한국을 얕잡아 보는 인식이 팽배하게 되었다. 실제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넷 우익]] 중에는 이 시기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는 중노년층이 있다고 한다. 당연히 이는 한국에 알려지면서 반일 감정의 소재로 활용되었다.많은 이들이 모르거나 언급이 잘 안되는것이 있는데 [[독립유공자]]들을 발굴하고 국민적으로 이와 관련된 교육을 적극적으로 처음 시행한 것은 권위주의 정권들이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으로 '''국가 유공자에 대한 보상'''이 실시되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들이나 [[6.25 전쟁]] 유공자들의 공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1962년]]에 [[안중근]], [[강우규]], [[윤봉길]], [[이준(열사)]], [[김구]] 등을 포함한 18명을 [[건국훈장]]-대한민국장에, [[이봉창]], [[나석주]], [[신돌석]], [[신채호]], [[장인환]], [[홍범도]], [[지청천]] 등을 포함한 58명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수훈하였다. 1968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이 "일제 때에 변형된 조선 왕조의 도로 중심축을 복원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니 일본이 가장 무서워 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는 지시를 내려 이는 지금의 [[경복궁 광화문|광화문]]에 조성되어있는 [[이순신]] 동상이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48754.html#csidxd799700b3768198a68574a6c33d095f|#]] [[1982년]] 일본 고교 역사 교과서 검정 당시 문부성이 한국에 관련된 내용을 일본 측에 유리한 형태로 수정하면서 역사왜곡 이슈가 터졌다. 한국 내 여론은 독립운동과 같은 역사를 보존하고 후대에 알려야 된다는 여론이 비등해졌고, 500여억 원의 국민성금으로 지금의 [[독립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정재정, 『주제와 쟁점으로 읽는 20세기 한일관계사』 (서울: 역사비평사),] 이러한 정치적 문제들을 보면 험악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냉전]]이라는 국제정세에서 [[북한]], [[중공]],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을 해야 하는 공통점으로 안보 공조체계를 이루어 표면적으로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경제적 분야에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 근현대의 일본은 한국으로서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반대로 일본으로서는 한국이 눈에 들어올 이유가 없었다. 한국의 경제는 70년대에 이미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 불리며 주목받고 있기는 했지만, 일본은 그 수준을 넘어 이미 1970년대에 [[오사카 만국박람회]]를 기점으로 선진국에 진입한 상태였다. 또한 1980년대에는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의 문제가 드러나기 전까지 미국을 뛰어넘고 최고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받고 있던, 경제력과 국력 면에서 절정기에 있는 나라였다. 당시 한국 기업들은 일본의 제품과 경영전략을 벤치마킹하기 바빴고, 미국식 경제모델[* 공정거래법, 카르텔방지법, 반독점법 등이 대표적이다.]을 받아들인 경제관료와 달리 일선 기업인들은 일본 모델을 택했는데, 1990년대 중반까지 성행했던 평생고용제도나 연공서열제, 사업다각화, 장인정신, 잇쇼켄메이, 직장가족주의, 인사관리제도 등이 일본에서 배워온 것이다. 특히 삼성전자의 경영전략은 1980년대까지 줄곧 일본 기업 모방이었으며, 롯데그룹처럼 재일교포가 세우거나 진출시킨 기업들은 일본식 경영제도가 몸에 밴 경우가 있었다. 일본 상품이나 일본 문화의 경우 수입이 금지되어 있어 쉽게 접할 수는 없었으나, 암암리에 부유층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위에서 설명한 [[1965년]]을 기점으로 선진 기술과 자본 부품 소재들이 쏟아져 들어와 이를 조립.가공해 미국 시장에 파는 당시 태평양 삼각 경제구조로 불리던 "양국은 경제적으로는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http://stat.kita.net/stat/world/major/KoreaStats06.screen|K-stat: 한국의 10대 무역국]] 수출국/수입국 버튼을 누르면 [[1988년]]까지 이러한 무역구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80년대에는 정치적인 관계도 매우 호전되었다. [[1983년]]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현직 수상으로 처음으로 한국을 공식방문[* 현직 수상의 비공식 방문은 이전에도 있었다. [[사토 에이사쿠]] 수상이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식 참석을 위해 방한한 바 있고,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이 육영수 여사 영결식 참석을 위해 방한한 바 있다.] 하여 정상회담을 하였고 [[1984년]] [[전두환 대통령 일본국 공식 방문|전두환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처음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도 일본 방문을 했으나, 이들은 공식적인 차원에서 방문한 것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히로히토]] 천황은 전두환 대통령과 만찬에서 “금세기의 한시기에 있어 양국간의 불행한 역사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는 되풀이돼서는 안된다"는 언급을 하였다.[[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50330010017925|전두환1984년 방일때 일왕 과거사 ‘첫 언급’ 이유는]] 1988 서울 올림픽에도 일본이 참가했는데 가나다순으로 입장했기 때문에 ㅇ으로 시작하는 일본은 비교적 후반부에 입장했고 중국보다 먼저 입장했다. 이 대회에서 일본은 금메달 4개, 은메달 3개, 동메달 7개를 획득했다. 그러나 [[쇼와 덴노]]가 올림픽 개막 후 얼마 안 되어 쓰러지는 바람에 바로 옆 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렸는데도 일본에서는 올림픽 열기가 식어 버렸다. 1990년대에는 한일 관계에 긍정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통해 일본 정부가 전쟁과 식민 지배에 사과를 표명했고, 1998년 [[일본 정부]]와 [[궁내청]]에서는 [[1998년]] [[10월 7일]],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이 일본을 국빈으로 방문했을 때 만찬 자리에서 처음으로 [[아키히토]] [[일본]] [[천황]]이 [[한반도]]에 대한 '[[고통]]'과 '[[사과]]'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언급한 것이 그 예다.[[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8/2005188_19498.html|아키히토 일본국왕 발언]][[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8/2005187_19498.html|일본 국왕 김대통령 초청 만찬서 한국 고통 사과]] 하지만 1990년대에도 결코 우호적인 관계로 일관된 것이 아니었다. 1995년 11월 8일에 전해진 에토 다카미 총무청 장관은 "[[한일합방]]은 나라의 힘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단행된 것이었다. 더구나 일본은 한일합방을 통해 한국에 좋은 일을 많이 해준 것이 학교도 도로도 지어주었다. 창씨개명도 강제로 진행되지 않았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에토 다키미의 발언 며칠 후 열린 1995년 11월 14일 [[김영삼]]과 [[장쩌민]]의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의 발언을 화근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난징대학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묻자 장쩌민은 “어렸을 때 내가 직접 봤는데도 일본은 그런 일 없었다고 잡아뗀다"라고 했다. 이에 김 대통령은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계속되고 있다.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라고 했다. 일본은 경악했다. 대통령 외교비서관으로 현장에 있었던 유 전 장관은 “이 발언이 IMF 행을 불렀다"라고 한다.[[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4|22년전 IMF 위기는 일본 은행에 의해 터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