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정식 (문단 편집) == 상세 == 반찬을 다수 놓고 먹는 건 조선시대 민화에서도 수차례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 1800년대 말에 만든 [[https://www.kculture.or.kr/brd/board/640/L/menu/641?brdType=R&thisPage=47&bbIdx=11978&rootCate=&searchField=&searchText=&recordCnt=10|반상식도]]에서는 지금의 한정식 상차림과 유사하게 한 상에 여러 음식을 올려 대접한 것이 확인된다. 또한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90363&cid=40942&categoryId=32136|궁중의 진어찬안 문화]]에서 보듯이 한국의 중중에서도 시간 순서에 따라 음식이 나오는 문화가 있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주영하 교수에 따르면 '한정식'이라는 용어는 광복 이후 서양의 정식에 대응하여 행정편의적으로 붙인 말이라고 한다.[* 한정식이라는 표현은 1947년 기사에서 발견된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711090032920302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7-11-09&officeId=00032&pageNo=3&printNo=340&publishType=00020|#]]] 한정식의 시작은 안순환(1871년~1942년)이 [[대한제국]] 시기인 1903년 명월관[* 개업 당시는 명월루라는 이름으로 개업. 1906년에 명월관으로 이름을 바꿈]이라는 요릿집을 개업하여 궁중 요리를 대중에 팔기 시작한 것을 그 시작으로 본다. 이 명월관에서는 한국요리 외에 외국요리, 서양과자와 담배도 취급했다. 안순환이 대령[[숙수]] 출신이었다는 추측이 있었으나 연구 결과 그건 아니고 그는 1898년 [[탁지부]] 전환국의 건축 감독으로 궁에 들어갔고 이후 판임관 육등, 전환국 기수를 거쳤다. 그러던 중에 1903년 명월관을 개업했다. 일종의 겸직을 한 것이다. 이후 그는 전선사 장선을 맡기도 했다. [[https://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346249.html|#]]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105172125335|#]] 한정식집은 대체로 조용히 분위기 있게 여럿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실내구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상견례나 중장년층 모임, 회갑연 등의 장소로 선호된다. [[드라마]], [[영화]] 등의 대중매체에서도 지위가 높고 연배가 있는(최소 60대 이상) 어른을 모실 때는 거의 대부분 한정식집에서 대접하는 모습이 나온다. 대규모 한정식집은 2010년대 이후로 쇠락세가 되었다. 한정식에서는 필연적으로 2가지가 필요하기 때문인데, 바로 수많은 반찬을 동시에 만들 수 있는 공간과[* 음식은 그 자리에서 바로 만들어서 올려야 한다. 주방에서 여기서는 생선 굽고, 저기서는 고기 굽고, 다른 곳에서는 전 부치고, 거의 동시에 나물을 무친다.], 그 반찬을 만드는 인력이다. 노동집약적이면서 동시에 주방이 많이 넓어야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는 이런 영업형태가 잘 유지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개인 손님들도 받을 수 있도록 소규모 한정식으로 시도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추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