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주호 (문단 편집) == 순직 == [[2010년]] [[3월 27일]] [[천안함 피격사건]] 하루 뒤의 [[새벽]] [[백령도]]로 급히 파견되었다. 한주호 준위는 출동 명령이 없었지만, '아들과도 같은 이들이 바다 속에 있다.' 라는 통화와 함께 자발적으로 구조작전에 참여하였고, 그는 30일 함수 부분에서 탐색구조작업을 펼치다 [[잠수병]]으로 실신해 [[미합중국 해군|미 해군]] 구난함 USS 살보(Salvor) 함의 [[감압 챔버]](Chamber·감압실)에서 치료를 받다가 오후 5시쯤 [[순직]]했다. [[향년]] 53세였다. 그는 함장실에 실내 진입을 위한 인도용 밧줄을 설치하는 팀에 속해 있었다. 그는 아끼던 후배와의 전화에서 '오늘 무조건 격실 전부를 탐색해 후배들을 구해줘야겠어' '가족들이 애태우고 있다, 빨리 구조해야해, 책임지고 해낼 거야' 등 희생정신과 군인정신을 보여주었고, 영웅이라는 칭호도 부족할 만큼 진정한 군인과 선배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보국훈장 '광복장'만이 추서되었지만 한 준위의 그동안의 군인으로서의 업적과 공로에 비해 부족한 예우라는 여론의 질타가 이어졌고[* 수십 년 군복무하고 전역한 군인에게도 보국훈장은 나온다. 물론 오랫동안 군에 복무한 것도 공은 맞지만, 이번 경우는 수십 년간 복무한 군인이 임무 도중 순직한 상황이기에 보국훈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그리고 저때는 보국훈장 수여 조건이 지금보다 좀 널널한 편이었다. 현재는 많이 빡빡해졌다.], [[이명박]]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의 특별지시로 무공훈장 수여 검토 후에 [[대한민국 훈장#s-6|충무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제3 장교묘역[* 해군은 준위를 장교로 대우한다.]에 안장되었고, 그 희생은 국정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youtube(yMOuqutz5Uw)] 영결식 당시의 영상이다.[* [[장송곡]]은 [[프레데리크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쇼팽)#s-4.3|소나타 2장 3악장인 장송 행진곡이다.]]] 당시 UDT 대원들이 운구행렬을 가로막는 돌발상황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한주호 준위를 이대로 그냥 보낼 수는 없다'''는 대원들의 뜻이었고, 그 자리에 있던 UDT 대원들 모두가 [[군가]] 《사나이 UDT》를 목메어 부르며 그의 영전에 바쳤다. 그리고 한주호 준위가 풋내기 시절이었을 때 고참이었을 연배의 퇴역 노병들까지 모두 목놓아 군가를 불렀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독기서린 특수부대원들이 눈물을 쏟아낸다는 것만으로도 고인이 살아생전에 얼마나 덕을 쌓았고 후임들에게 잘 대했는지 알 수 있다. 군가를 다 마친 뒤 UDT대원들의 마지막 경례를 받으며 운구행렬은 [[대전현충원]]으로 이동했다. 한주호 준위는 동료들과의 통화에서 '오늘(2010년 [[3월 30일]])안으로 모든 실종자들을 책임지고 구조해내겠다.'고 말하고 구조 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이 통화내용은 결국 [[유언]]이 되고 말았다. 아들과의 마지막 통화에서 한주호 준위는 '많이 춥고 힘들지만 아빠는 끝까지 계속 할 거야' 라며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한주호 준위는 주위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인격으로, 임무에 있어서는 강인한 책임감으로 무장된 아주 훌륭한 군인이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