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중일 (문단 편집) == 역사 == > 753년(신라 [[경덕왕]] 12년) 1월 1일, [[당나라]] 봉래궁(蓬萊宮)에서는 신년을 축하하는 의식이 거행됐다. 그런데 식장에 참석했던 신라 사신과 일본 사신 사이에 다툼이 벌어진다. 누가 더 서열이 높은 자리에 서느냐를 놓고 빚어진 갈등이었다. 애초 당 조정은 서반(西班)의 서열 1위에 [[토번]](吐蕃) 사신, 2위에 일본 사신을, 동반(東班)의 서열 1위에 신라 사신, 2위에 [[대식국]](大食國) 사신을 배치했다. 그런데 일본 사신 대반고마려(大伴古麻呂)는 “신라는 옛날부터 일본에 조공하는 나라인데 일본 사신보다 윗자리에 서게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당 관리들에게 항의했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당 조정의 책임자 오회실(吳懷實)은 부랴부랴 일본 사신과 신라 사신의 자리를 바꿔주었다 한다. 당 조정에서 누가 더 높은 대접을 받느냐를 놓고 신라와 일본 사신이 벌인 이 다툼을 ‘쟁장(爭長) 사건’이라고 부른다. >---- > [[https://mnews.joins.com/amparticle/23981254|출처]] [[https://m.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181923650|출처2]]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떼놓고는 아예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인도]]에서 발원한 [[불교]]와 중국에서 시작된 [[유교]]는 [[중화권|중국]]을 타고 [[한국(동음이의어)#한민족이 건국한 국가 한국(韓國)|한국]]을 거쳐 [[일본사 관련 정보|일본]]까지 퍼졌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한자]]는 한중일 모두가 활용한다. 이러면서 한중일은 [[한자 문화권|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특히 중국의 정세가 중요했는데 중국과 땅으로 연결된 한국은 여기에 늘 긴장의 끈을 조이고 풀고 반복했으며 일본은 동해를 끼고있기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었으나, 일본의 이웃 국가 중 가장 밀접한 곳이 한국이니 결국 어떻게든 일본도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세 나라 모두 [[왜구]] 때문에 문제를 많이 겪었는데 [[고려]]는 왜구를 토벌하면서 세력을 키운 무인들이 [[위화도 회군|정변]]을 일으켜 [[조선]]이 됐고 [[명나라]] 역시 동남부 해안 지대에서 몸살을 앓아 왜구를 토벌하면서 아예 해금령을 내려 주민들을 내륙으로 옮기고 했다. 일본은 왜구 때문에 툭하면 외교적으로 조선과 명나라에게 털렸기에 막부 차원에서 나중에 왜구를 처리했다.[* 자국민이라고 봐줬을 것 같지만 막부 입장에선 자기네 직속도 아니라 이득볼 것도 없는데 지방 세력들 배를 불려주는데다 외교적 마찰로 외국의 침략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에 중국이나 조선만큼 절박하진 않더라도 당연히 단속해야 할 집단이었다.] 왜구가 들끓은 시기는 대체로 일본 본토가 전란이나 혼란으로 인해 국가 차원에서 관리가 안 될 때였고 나중엔 영주들이 돈 벌려고 거의 정규군 수준으로 편성하기도 했다. [[에도 막부]]에 간 뒤론 끊기지만. 한국과 중국은 중국의 통일왕조인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가 공격하여 전쟁을 치른 사례가 있고, 당나라 때는 [[백제]]가 망할 때 [[나당연합군]]과 [[왜국]]의 군이 만날 일도 있었다. 굳이 중국이 아니더라도 한반도는 북방의 [[여진족]]이나 [[거란]], [[몽골]] 때문에 중국 대륙과 늘 연결됐다. 조선은 북방 문제를 상당히 중시했으며 평안도나 함경도에 정예 병력이 주둔했다. 고려가 [[원나라]]의 지배하에 놓였을 땐 [[여몽연합군]]이 결성되어 일본을 침략하기도 했다. 일본 유사 이래로 외국군이 본국에 쳐들어온 건 처음이라 긴장했으나 때마침 나타난 태풍으로 몽골의 점령 계획은 흐지부지됐다. 참고로 여몽연합군 철수 이후 일본에서는 이때 불어닥친 태풍에 하나의 이름을 붙였는데 그게 바로 [[원나라의 일본원정#신의 바람(神風)|신푸]]. 시간이 흐르고 16세기 일본이 강대국의 반열에 올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하며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일본군과 거하게 전쟁을 벌인다. 끝내 일본은 [[막부]]를 갈아치운 이후, 전쟁 종결 의사를 표한다. 조선은 이를 받아들이고 명은 청의 침공과 각지의 반란 때문에 국력이 쇠하며 멸망한다. > 극단적인 유교 신봉자로서, 조선의 엘리트층은 중국이나 일본보다 상업 발달에 훨씬 큰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을 대상으로 한 조공 무역이나 일본, 여진을 대상으로 한 무역 이외에는 대외 교역을 통제해 나라를 진정으로 고립시켰다. '은둔의 왕국'이라는 조선에 대한 전형적인 묘사는 이 시기에 합당하게 들어맞는다. (중략) 조선의 인구는 1650년의 1000만 명에서 1810년 1400만 명으로 늘어났지만 이 증가율은 중국보다 훨씬 낮았고 생활수준 또한 별로 바뀌지 않은 듯 하다. 19세기 조선의 농업 생산량은 중국이나 일본보다 최소한 30퍼센트 이상 낮았다. (중략) 최대 도시 한양은 근세 인구 20만 명 크기로 성장했지만, 동시에 에도나 북경보다 훨씬 작았다. >---- > 하버드 C.H.베크 세계사 1350~1750 세계 제국과 대양 19세기에 이르러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구식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국력을 잃어가던 조선을 공격하고 패권 유지에 급급하던 청도 뒤늦게 제국주의 물결에 동참하려고 조선에 손을 들이밀다가 둘이 1894년에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청나라]]에 부정적이었던 터라 지금 들으면 생소하겠지만 일청전쟁이라고 했다. 수구파, 개화파 양쪽 모두 청나라를 싫어했는데 수구파는 수구파대로 [[만주족]]의 오랑캐 정권이니 정통 중국이 아니라고 싫어했고 개화파는 개화파대로 중국 자체가 구세력의 사상인 중화주의의 모체이니만큼 당연히 싫어했다.] 최종적으로 일본이 전쟁에 이기면서 청은 조선에서 추방되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고, 1897년 고종이 제국을 선포하면서 조선은 [[대한제국]]이 된다. 그 이후 1904년 [[러시아 제국]]이 일본과 대한제국 침략을 놓고 경쟁했으나 일본이 [[러일전쟁]]마저도 승리하면서[* 다만 러일전쟁은 일본이 완전히 이긴 전쟁이 아니다. 사실상 비긴 전쟁이다. 또한 영국이 러일전쟁때 엄청나게 지원해 준것도 있었다.] 결국 대한제국은 멸망하여 일본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청나라도 안에서 온갖 소용돌이로 어지러워 1912년에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되었으나 1920년대에는 [[군벌]]들의 난립으로 내전 상태가 된다. 그 사이 일본은 식민지로 전락한 한반도를 기점으로 삼아 차근차근 국력을 키워나갔고, 마침 1930년대가 되자 누더기가 된 중국을 공격해 만주를 점령하는데 성공, 그 직후 [[만주국]]을 세운다. 군벌간의 [[반장전쟁]]에서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으로 갈려서 싸우고 있던 중국은 [[국공합작]]을 이루며 침략자 일본과 싸웠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 [[중일전쟁]]에서 승리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 세력은 일본이 포함된 [[추축국]]들에 대한 전범 재판과 처벌, 이들의 소유하던 식민지들을 깔끔히 해산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때 한반도와 타이완을 비롯한 일본의 동북아 식민지들이 해방하게 된다. 그 이후에도 연합국 측은 박차를 가하며 일본의 국가 체제 자체마저 뒤바꾸려는 시도를 가행하나 때마침 [[소련]]이 한반도까지 남하하면서 한반도의 북부는 공산정권이 세워지고 남부에는 미군이 들어와 [[대한민국]]이 생긴다. 제국주의의 물결이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갈등인 [[냉전]]이 자리잡은 순간이었다. 또한 1949년에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다시금 다투게 되었고, 그 [[국공내전]]의 결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니 [[중화민국]] 정부는 [[국부천대|타이완으로 쫓겨났다.]] 그 후 한중일에서 한은 이 대한민국을 가리키는 말, 중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간혹 [[대만]](중화민국)을 중으로 하여 [[한국-대만-일본 관계|한중일]]을 표기하는 경우도 있으나 1970년대 이후로 이런 용례는 잘 보이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