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할버드 (문단 편집) === 집단 전투 === 스위스가 유럽에서 할버드를 가장 애용한 국가였는데, 부르고뉴 전쟁에서 죽은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은 낭시 전투(Battle of Nancy)에서 [[스위스 용병]]대가 휘두른 할버드에 머리가 찍혀서 죽었다.[* 투구를 쓴 상태였는데도 머리가 투구째로 쪼개져 전사했다고 한다(...)] 스위스식 장창진 기법을 채용한 독일 [[란츠크네히트]] 역시 [[츠바이헨더]]와 함께 할버드를 사용했다. 집단전에서는 [[폴액스]]와 비교해볼 때 자루의 길이가 길고 상단의 창날 즉 스파이크의 길이가 길었으므로, 도끼날을 이용해 힘껏 찍어내는 것보다 찌르면서 도끼날로 적들의 창을 잡아당기거나 재끼면서 아군 창수의 공격을 원활히 해주는 방향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대 기병전에서는 대열이 엉킨 기마병에게도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개인전투에서처럼 크게 가로나 대각선으로 휘두르는 것은 옆에 동료가 있었으므로 불가능하였다. 이렇듯 집단전에서 비교적 대오가 얇거나, 덜 촘촘하게 백병전을 치르던 때에는 그래도 공간이 어느정도 확보가 되어 일반창과 같이 쓰며 활약할 수 있었지만, 창의 길이가 더 길어지고, 병사들의 대오가 두껍고 더 촘촘해지면서 서서히 도태되어갔다. 구체적으로 르네상스가 되면 [[팔랑크스]]와 같은 장창방진이 부활하는데, 그래서 1열부터 5열까지 모든 병사가 일체가 되어 앞을 향해 폭이 좁은 창으로 찌르는 것 외에 다른 공격은 할 수 없을 정도로 버거워지다보니[* 그러다보니 이시대 창병들은 창대를 허리가 아닌 어깨높이까지 들어서 찔렀다.] 할버드는 창날의 면적이나 폭에서 앞뒷열의 다른 병사가 내지르는 창과 엉킬 수 있는데다가 창대의 길이도 창날모양이 단순하고 가벼웠던 일반 [[파이크]]에 비해 짧아 포지션이 애매해졌다. 중세부터 르네상스 초기에는 대열 전면에서도 장창과 섞여서 소수로 배치되어 장창방진을 보조해주는 역할을 하다가, 나중에는 대열이 덜 촘촘하거나 빈틈이 많이 생기는 측면과 후방에 배치되는 것으로 밀려났고, 그마저도 더 후에는 총병들에게 검을 쥐어줘서 측후방에 배치하기 시작하면서 그 자리를 완전히 내어준다. 그래도 여전히 경비용이나 의장용 무기로서의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부사관 등이 지휘기 비슷하게 휴대한 경우가 있으며 18세기에 [[스펀툰]]이 된다. 바티칸을 지키는 [[스위스 근위대]]는 현재도 할버드를 의장용으로 애용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