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함풍제 (문단 편집) == 즉위 전 == [[도광제]]의 넷째 아들이며, 생모는 효전성황후 뉴호록씨이다. 도광제가 사망할 시점에는 형들이 모두 요절했기 때문에, 그가 실질적인 장남이었다. 그가 즉위하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도광제의 정실이었던 효목황후는 자녀가 없었고, 효신황후는 딸 1명을 낳았다. 도광제는 황자 시절 시녀를 범해서[* 화비 나라씨이다.] 의도치 않게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도광제의 장남인 혁위(奕緯)이다. 도광제는 신분이 낮은 시녀에게서 의도치 않게 아들을 얻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이것으로 인해 자신의 평판에 흠이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하지만, 가경제는 처음 얻은 손자를 기뻐하여 혁위를 패륵(貝勒)에 봉했으나, 도광제는 이를 싫어하여 자신이 즉위한 직후, 혁위에게서 패륵 지위를 박탈하고 평범한 황자의 지위로 내려가게 하였다. 도광제는 황후가 낳은 적자를 원하였기 때문에 혁위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런 잘못없이 작위를 취소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다. 청의 법제에 따르면 공이 있으면 작위를 올려주고, 죄가 있어야 작위를 강등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도광제가 혁위를 패륵으로 봉하면 제신(諸臣)들이 그를 후계자로 생각할까 염려해서였다. 하지만, 도광제에게는 적자가 태어나지 않았고, 당시 총애하던 정비(靜妃)가 낳은 차남과 3남은 유아기 때 요절하고, 또다른 총비 전귀비(全貴妃)[* 함풍제의 생모 뉴호록씨는 14세때 [[도광제]]의 후궁으로 간택되었는데, 명문가 출신에 미인에다 총명하고 성격도 온순해서 전부 뛰어나다 라는 의미로 '전귀비'라 불리었다. (이후 효전성황후로 추존)]는 공주를 연이어서 낳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도광제의 나이 50세가 가까워지면서 유일한 대안은 자신이 사랑하지 않은 아들인 장남 혁위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비로소, 혁위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그에 걸맞는 스승을 붙여주어 제왕학을 가르치는등 신경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도광제의 무시와 냉대를 받으며 사는 동안 혁위의 성격은 고집스럽게 변해 아버지와 자주 충돌하였고, 결국 1831년 5월에 혁위가 23세의 나이로 죽었다. <청사고> 등에는 전년부터 아팠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야사에서는 혁위가 공부에 신경쓰지 않고 방탕하게 놀다가 도광제가 분개하여 질책하다가 혁위의 중요부위를 걷어차서 갑작스레 죽었다는 얘기도 있다. 혁위가 1831년 5월에 죽은 직후, 그해 7월에 전귀비(全貴妃)가 도광제의 넷째아들인 혁저를 낳았다. 도광제의 나이 50세에, 그 시점에서는 유일하게 얻은 아들이었다, 1833년 효신황후가 죽자, 전귀비는 황귀비가 되었고. 효신황후의 3년상 이후에 황후로 책봉됨으로서 혁저도 적자로 승격되었다. 1840년 효전황후가 죽었는데, 이 때 혁저의 나이 10세였고. 그의 양육은 동생 [[공친왕|혁흔]]의 친모인 정귀비에게 맡겨졌다. 효전황후의 죽음에는 야사가 전해진다. 함풍제는 이미 황자 시절부터 동생 혁흔에 비해 무능함이 드러나 후계자 자리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효전황후는 자기 아들이 제위를 잇게하기 위해 혁흔이 먹을 생선요리에 독을 탔으나 고양이가 먹고 거품을 물고 죽자 추궁당하여 전모가 드러나 아들을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고 한다. 물론, 야사일 뿐이다. 청 황실에서 자살은 큰 죄이므로 친어머니가 자살을 했다면 오히려 아들의 앞날에 걸림돌이 되었을 터이기 때문. 정귀비에 의해 양육된 혁저는 정귀비를 생모처럼 여기면서 효로써 섬겼고, 정귀비의 아들인 혁흔(도광제의 6남)도 친동생처럼 여겼으며 유년시절을 같이 보냈다. 도광제의 5남 혁종은 숙부인 돈친왕 면개의 양자로 입양되어서 후계경쟁에서 탈락하였고, 7남 혁현 이하는 아직 어려 후계가 될 수 없었다. 자연히 도광제의 말년은 혁저와 혁흔이 후계자 지위를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혁저는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곰보]] 자국이 있었으며, 또한 수렵사냥 중 낙마하여 부상을 입은 이후부터 다리가 불편한 점이 있었다. 혁흔은 문무에 능통하고 활달한 기개가 있어서 도광제가 총애하였다. 도광제에게 혁저는 유일한 적자이기도 했기에 혁저를 효전황후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총애하였다면, 혁흔은 문무에 고루 능하고 국제정세에도 관심이 많은 다재다능함으로 인해 사랑하는 바가 컸다. 혁저가 [[도광제]]의 유일한 적자이긴 했지만, 사실 청나라는 중국사의 다른 흔한 한족왕조와 달리 무조건 적자에게 제위를 물려주지 않고 오로지 능력(+ [[외가]]를 비롯한 여러 배경)으로 계승이 이뤄진 사례가 많았고 [[옹정제]] 때는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도 도입[* 황제 생전에 공식적으로 태자를 지정하지 않고 대신 자금성 정전인 건청궁의 판액인 정대광명’(正大光明) 현판과 황실 관청인 내무부에 각각 후계자를 낙점한 황제의 유조를 은밀히 보관한 뒤 황제가 붕어한 뒤 두 유조의 이름이 같다면 그 인물을 차기 황제로 즉위시키는 제도였다. 더 정확히는 청나라 초기 순치제까지는 능력 위주의 황위 계승이 이루어졌으나 강희제 즉위 후 태자(윤잉)를 공식 지정하였다 폐위시키는 사태가 반복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옹정제가 이를 공식적으로 도입한 것이다.]했기 때문에 적자 함풍제가 너무 소질이 없어보인다면 얼마든지 그것을 뒤집고 다른 서자가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 당장 도광제도 적장자이긴 하지만 형제들 중 가장 뛰어난 능력과 인품을 자랑했기에 즉위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무능했던 함풍제가 어떻게 즉위할 수 있었는지 설명하는 야사(野史)가 있다. 도광제가 죽기 얼마 되기 전에 혁저와 혁흔을 같이 불렀는데, 형과 마찬가지로 스승에게 코칭을 받긴 했지만 벼락치기가 필요없을 만큼 [[조식(삼국지)|평소에 열심히 공부하고 생각해오던 여러 국정 현안에 대해 막힘없이 답한]] 혁흔과 달리 두수전(杜受田) 등 스승들에게 쪽집게 과외를 받은 함풍제는 [[조비|'''황제의 병세가 이리도 악화되었으니 이는 다 자식인 자신의 잘못이라면서 펑펑 울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눈물 --[[감성팔이]]-- 작전이 먹혀서(…) 후계자는 함풍제가 되었고 혁흔은 공친왕 책봉에 그쳤다. 그래서 '혁흔이 후계자가 되었다면'이란 가정은 지금도 가끔씩 회자된다. 정사에는 도광제와 황친들이 수렵사냥을 나갔을 때, 혁저가 단 한 발의 화살도 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보고, 도광제는 그가 생명을 중히 여기는 인효한 인품임을 크게 칭찬했다고 하며, 그로서 혁저를 후계자로 정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1846년의 일) 입태자 문제에 대해서는 현대 역사학자들 간에 논쟁이 많다. 함풍제가 즉위 이후 보여준 무능함, 사실 그보다도 '''[[서태후]]를 그나마 견제할 수 있던 유일한 걸물'''이었다는 점에서 [[공친왕]]이 아예 형 대신 황제로 올랐더라면 ~~서태후의 깽판을 볼 일도 없고~~ 하는 가정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는 있으나, 근래로 올수록 함풍제도 황자 시절 나름대로 능력을 입증한 바 있었으며, 유교적 가치가 중시되던 사회에서 서양이 추근거리는 국제정세에 밝고 서양 문물의 도입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반대로 보수세력과는 껄끄럽던 공친왕과 달리 함풍제의 인품이 도광제와 보수파 중심의 중신들 사이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았기에 경쟁에서 앞서가는듯했던 혁흔을 역전하기에 충분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함풍제에 대한 재평가를 둘러싸고 현재 대륙학계에서는 상당한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