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함풍제 (문단 편집) === [[태평천국의 난]] === 즉위한 바로 그해인 1850년 12월, [[중국]] 사상 최대 규모의 [[민란]]인 [[태평천국의 난]]이 시작되었다. 낙방한 유생 [[홍수전]]이 [[야훼]]의 아들임을 자처하며 스스로 천왕이라 부르며 금전촌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이후 청나라에 실망한 사람들이 대거 모여들며 세를 빠르게 불렸다.[* 대체적으로 [[만주족]]인 청 황실에 대한 뿌리깊은 모멸감, 아편 전쟁 등으로 갈수록 피폐해지는 경제, 자연재해의 연이은 등장 등으로 당시 청나라 국민들의 민심은 크게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후 태평천국은 멸만흥한(滅滿興漢)[* 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킨다]를 기치로 내걸고 영안(永安)을 점령하였으며, [[우한]] 등도 손아귀에 넣었다. 1853년 3월에는 마침내 중국 남부의 핵심부인 [[난징]]을 점령하였으며, 이후 난징을 천경(天京)으로 개칭하고 수도로 삼았다. 태평천국은 난징을 얻은 후 청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을 들이치자는 북벌론과, 일단 [[장강]] 유역을 따라 영토를 불리며 힘을 키우자는 서정론으로 나뉘었다. 당시의 실권자였던 동왕(東王) 양수청[* 태평천국은 천왕인 홍수전 아래에 동왕(東王) 양수청(楊秀淸), 서왕(西王) [[소조귀]](蕭朝貴), 남왕(南王) [[풍운산]](馮雲山), 북왕(北王) [[위창휘]](韋昌輝), 익왕(翼王) [[석달개]](石達開) 등 총 5명의 왕들을 따로 두었다.]은 이를 동시에 실시하기로 결정했고, 1853년 5월에 북벌군에는 임봉상과 이개방을, 서정군 지휘관에는 익왕 석달개를 임명하여 각각 보냈다. 다만 북벌군은 청나라의 대대적인 공세와 인적 열세를 견디지 못하고 1855년에 고립된채 농성하다가 전멸당했으며, 이개방은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여 죽는다. 한편 서정군은 상대적으로 더 나은 성과를 올렸다. 함풍제가 북벌군의 진군에 놀라 모든 병력을 베이징에 몰빵하는 사이, [[증국번]]이 이끌던 청나라의 상군은 태평천국 군대에게 연이어 패배하였고, 증국번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다만 홍수전이 수도 바로 옆에 주둔한 청군을 몰살하기 위하여 익왕 석달개를 다시 불러들이면서 중국 서부의 청나라 군대는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석달개의 군대는 난징으로 돌아가 난징 바로 곁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의 강북대영과 강남대영을 몰살시켰고, 이로서 태평천국에는 진정한 전성기가 도래한 듯 보였다. 태평천국은 남녀 평등, 구시대 악습 타파, 사유재산 금지, [[아편]] 금지 등 급진적인 사회 개혁 정책들을 내놓으며 민중의 지지를 얻었으나, 시간이 흐르자 이들의 이상도 변질했고 태평천국 지도층은 오히려 청나라 관리 못지않은 [[약탈]] 행위를 저지르며 인심을 잃고 말았다. 게다가 지도층의 내분도 상당히 심각했는데, 특히 동왕 양수청이 점차 홍수전의 지위를 노리자 홍수전은 북왕 위창휘와 연왕(燕王) 진일강(秦日綱)을 은밀히 불러 양수청을 제거할 것을 명령했고, 1856년 9월 2일, 북왕부와 연왕부의 군대가 동왕부를 기습해 양수청을 살해했으며, 이를 천경사변(天京事變)이라고 한다. 게다가 유능한 군지휘관이었던 석달개는 홍수전의 친인척 감싸기를 참다못해 1857년 여름에 정예군 10만을 이끌고 [[쓰촨성|사천]] 지방으로 도망가기까지 했다.[* 이들은 초기에는 승승장구했으나, 나중에는 [[보급]]도 받지 못하다가 결국 청군에게 전멸당했다.] 아무튼 지도층 간의 내분은 갈수록 심해졌고, 한편 함풍제는 [[증국번]]을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본격적인 반격에 들어갔다. 이후 이홍장은 연합군인 상군(湘軍)을 이끌고 서구 열강들의 도움을 받아[* 서구 열강들은 반외세, 자주를 주장하는 태평천국의 도움을 전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만만하고 친숙한 청나라를 훨씬 선호하였기에, 나중에는 청나라를 본격적으로 도와주었다.] 태평천국을 멸망시켰다. 태평천국의 난은 13년이나 계속되어 함풍제가 죽은 이후인 1864년 8월에야 태평천국의 수도인 [[난징]]이 함락되어 끝났으며, 흡사 [[강희제]] 시절의 [[삼번의 난|오삼계의 난]]처럼, 아니 그보다 더더욱 심할 정도로 중국 남부를 폐허로 만들었다. 이미 [[백련교도의 난]](1796년 ~ 1805년)으로 재정 낭비가 심했던 청나라는 또 없는 살림에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여 재정이 완전히 탕진되었고, 가장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강남(중국)|강남]]이 초토화되어 경제, 사회적으로 몹시 피폐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