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함풍제 (문단 편집) == 평가 == '''시대를 모른 청나라 최악의 암군'''[* [[천명제]]~[[건륭제]]까지는 명군이었고,(다만, 건륭제는 논란이 다소 있다.) [[가경제]]는 건륭제 말기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열심히 노력했고 (하지만 성과는 별로 없었다), [[도광제]]는 [[제1차 아편전쟁]]이 발생한 시기에 황제였으나 자기 잘못이라고 보기는 힘들며, [[동치제]]와 [[광서제]]는 [[서태후]]의 꼭두각시였으며, 어린 나이에 잠깐 즉위했다 망국으로 인해 퇴위했을 뿐인 [[선통제]]는 설명이 필요없다.]으로 평가받지만 그래도 시대적 분위기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다.''' 일부에서는 '''제위에 오른 것 자체가 왕조와 나라 모두에 재앙'''이라는 극악의 평가를 받고 있으며[* 물론 이 인간은 한 [[영제(후한)|영제]],당 [[의종(당)|의종]], 송 [[휘종(송)|휘종]], 명 [[만력제]]보다는 나은 편이다. 차라리 제위에 오르지 않고 일반 황족으로 평생을 보내거나 외세가 없었다면 청나라 최악의 암군 타이틀을 갖게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는 짓과 그 결과만 놓고 보면 변명거리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함풍제는 너무 젊은 31세의 나이에 사망해서 하나뿐인 아들 [[동치제]]는 10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황제에 올라야 했고 이는 결국 자신의 후궁 '''[[서태후]]'''가 [[동치제]]의 [[어머니|생모]] 자격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서태후의 실정이 청나라의 쇠퇴를 더욱 가속화시켰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나비효과가 아닐 수 없다.[* 다만 함풍제는 도장을 두 개 만들어 어상은 [[동태후]]에게, 동도당은 후계자 [[동치제|재순]](사실상 서태후에게 준것)에게 주었다. 성지에 두 개의 도장을 모두 찍어야 성지가 효력이 있게 함으로써 서태후에 대한 견제장치는 두었다. 서태후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나라를 쥐락펴락한 것은 견제장치라 할 수 있는 동치제와 동태후가 일찍 죽은 게 컸다. 동치제는 친정을 할 20세가 되기도 전에 병으로 너무 일찍 죽었고 동태후는 광서제가 성년이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괄의 난]]이 청나라에 유리한 나비효과를 만들어냈다면 함풍제의 즉위는 청나라에 불리한 나비효과를 만들어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함풍제가 죽고 딱 50년 뒤인 1911년에 청나라를 멸망시키는 [[신해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함풍제의 치세는 [[조선]] [[철종(조선)|철종]](재위 1849년 ~ 1863년)의 재위 기간과 대략 일치한다. 자연 재해는 빗발쳤고, 민란은 연이어 일어났지만, 정작 왕은 무능하여 그냥 놀고 먹다가 가버렸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근데 철종 위에 있던 게 세도 가문들이었다. 뭘 해보고 싶어도 할 수 없었고 그럼에도 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철종은 오히려 광서제와 비교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또한 철종이나 함풍제가 [[헌종(조선)|이전의]] [[도광제|군주들]]에 비해 정치력이 미달이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 둘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기에는 어폐가 있다. 조선이나 청나라가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게 되는건 이 시기가 아니라 몇십년쯤 지난 이후이며 그것도 당시 재위했던 군주가 아니라 '''실권을 쥐고있던 [[서태후]]와 [[공친왕]],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삽질이 결정적인 원인이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시기까진 두 나라 모두 회생의 기회가 충분히 존재했었다는 것이 현대 역사가들의 중론. 특히 청나라의 경우에는 자그마치 100년도 전인 [[건륭제]] 때부터 곪아있던 게 폭발해서 함풍제의 할아버지인 [[가경제]] 때부터 반란이 줄지어 일어나는 등 나라꼴이 조선 이상으로 개판인 상황이였다.] 반면 [[에도 막부|일본]]은 1853년 미국의 [[매튜 페리(군인)|페리 제독]]에 의해 [[쿠로후네 사건|강제로 나라의 문을 열면]]서 일시적으로는 혼란해졌으나, 1867년의 [[메이지 유신]], 이후 동아시아 유일의 [[일본 제국|제국주의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다만 동시대에도 막부의 쇼군의 상황은 청나라나 조선보다 더 심했다. 그나마 신체적으로나마 문제가 없었던 함풍제나 철종과 달리 비슷한 시기에 제위했던 도쿠가와 이에사다나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각각 [[뇌성마비]]와 [[각기병]]에 걸렸다는 의혹이 있어서 정상적으로 정무를 보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급변하는 정국의 주도권을 막부는 쥘 수 없었고 결국 이를 극복하지 못해 청나라나 조선보다 먼저 시대에서 물러나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