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해부학 (문단 편집) == 역사 == 해부학의 기원은 인류의 역사와 같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의학서적으로 불리는 [[황제내경]]에도 해부를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이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인체 해부는 13세기 말 이전까지 어떤 문화권에서도 정기적으로 시행된 적은 없었다.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까지의 기간이 유일한 예외인데, 이집트의 알렉살드리아에서 헤로필루스와 에라시스트라토스라는 두 사람의 그리스 의학자가 해부를 토대로 인체를 연구했었다. 그러나 그리스와 로마에서 인체 해부는 대부분 회피되어 왔고 이것은 시체가 부정하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나오듯 유대인들도 시체가 부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시체를 다루는 해부학은 악마의 학문이나 악마의 지식 그 자체로 받아들여졌고 특히 헤로필루스는 경악스럽게도 사형에 처해질 사형수를 산채로 묶어둬 죽을때까지 해부 실험을 진행해 당대 해부학의 정점에 이르렀으며 현대에도 해부학의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그 해부 실험의 과정이 워낙 끔찍해 그 과정이 드러나고 나선 아주 오래도록 그 모든 지식과 실험결과가 사장되게 되었다. 안그래도 부정한 것인데 사실상 사형의 한 방법으로 쓰이던 지식을 후대에 전한다는 검 당시 기준으론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기독교 문화권에 접어들며 무덤을 신성한 장소로 받아들이고 시신을 치유력과 마법의 원천으로 여기고 존중하면서, 시체가 부정하다는 인식은 많이 누그러들었다. 중세 교회 당국은 연구의 목적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인간의 해부를 용인했을 뿐 아니라 권장하기도 했다. 주로 종교적 목적에서였는데, 예를 들면 [[성인]]의 육신을 보존하고 기린다는 명목 아래 내장을 적출하거나 유해를 나누고, 성인이나 성녀의 내부 기관을 조사하여 거룩한 증표를 찾아내거나, 훗날 제왕절개라고 알려진 수술을 하여 죽은 산모에서 꺼낸 태아에게 세례를 주기 위해서였다. 허나 이것이 인체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오늘날의 해부학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편 유럽과 달리 당대 이슬람 문화권의 의학 발전은 유럽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는데 인체 해부가 어느정도 이뤄져 전장에서 부상병이 생겨도 어느정도의 처치가 가능해 이슬람 진영의 군대는 십자군 전쟁에서 의학덕에 큰 수혜를 입기도 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유럽권에서도 해부의 필요성에 대해서 인지하게 됐으며 신성로마제국을 필두로 꽤 기간을 두고 이미 사망한 시신에 한해서 해부를 진행하자는 논의가 이뤄진다. 오늘날과 같이 [[의학]] 교육과 연구를 목적으로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인체 해부는 1300년에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교]]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15세기 말이 되자 해부 수업은 북부 유럽의 [[의과대학]]에까지 퍼졌고, 16세기에는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지역을 막론하고 모든 의과대학에서 광범위하게 시행되었다. 이때 사용되었던 시체는 사형수의 시체가 많았는데,[* Fritjof Capra,'다빈치처럼 과학하라',강주헌 옮김,김영사,2011] 방부처리가 잘 안돼서 시체가 썩는 괴악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때의 해부학 수업은 갈레노스의 책으로 이론을 학습하다 필요한 곳만 해부하는 식으로 전개되어 제대로된 해부학으로 보긴 어려웠다. 해부학을 학문으로 정립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이었으며, 당대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로 대표되는 미술가들과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De humani corporis fabrica)를 지은 [[베살리우스]]가 주도했다. 레오나르도를 필두로 한 당대의 미술가들은 신체를 제대로 알아야 좋은 그림이 나온다고 믿었고 이것이 해부학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해부학의 발전은 [[윌리엄 하비]]와 여러 생리학자들에 의한 생리학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그 공로자인 베살리우스는 살아생전 비참하게 살아야 했다. 산 사람을 해부했다는 소문으로 종교재판까지 받을 뻔했다가 겨우 모면했다. 1564년 50살 때 성지여행을 가던 길에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또 다른 주장으론 그냥 도중에 섬에서 병으로 죽었다느니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며 무덤조차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헤로필로스 이후 1500년에 이르기까지도 해부는 종교적으로 매우 예민하게 관리되었기 때문에 베살리우스는 평생 혹은 그 이후까지도 이러한 소문으로 인해서 고통받아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사람의 육체를 열어본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르네상스 시기 이후 상업이 발전하고 십자군 전쟁과 같이 중세 유럽을 지탱하던 종교적, 도덕적 관습이 조금씩 잊혀지자 해부에 지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해부는 극악한 범죄자들이 죽고난 후 그 시신으로 진행됐는데 의사들 뿐 아니라 예술가들의 수요가 늘어나 일단 해부를 한다고 하면 시민 사회의 행사가 되버려 너도나도 공개된 장소에서 보는 것이 되었다. 당대의 이런 해부는 일종의 공연이나 다름 없었고 일종의 [[부관참시]] 같은 것으로 치부 되기도 했는데 어쨋거나 마을이나 도시의 잔치에는 해부가 꼭 있었을 정도로 당대의 이런 문화를 담은 그림도 있을 정도다.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고 과학의 발전이 진행되면서 의학의 발전도 크게 일어났는데 해부에 대한 열정은 더욱 지대해졌다. 이때문에 이름난 명사나 지식인, 예술가는 무조건 해부는 한번 해봐야 한다는 사회적 기조가 생겨났고 그 수요를 감당하지 못한 나머지 점차 시신이 도굴되거나 이렇게 도굴된 시신이 밀수로 넘겨지는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런 시신은 해부를 하려면 당연히 죽은지 얼마 안됐어야 해서, 묻힌지 얼마안된 시신을 꺼내가려고 무덤지기와도 결탁을 했었는데 당시엔 사망 판정에 대한 의학적 절차가 확실하지 않아 죽다 살아난 이를 보고 놀라 도망쳤다는 이야기나 죽다 살았으니 이참에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했다.] 19세기 초에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의학계가 알렉산더 먼로[* '''[[찰스 다윈]]'''이 에든버러 의대에 몸을 담고 있을 때 먼로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나 로버트 녹스 등의 해부학자를 필두로 유럽 해부학의 중심지를 차지한다.[* 다만 당시에는 해부실습이라는 개념이 없이 학생들/학자들이 교수 및 조교가 미리 해부해 놓았거나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해부를 진행하는 카데바 주위에 마치 극장처럼 둘러 서서 보면서 설명을 듣고 받아적거나 스케치하는 선에서만 수업이 이루어졌다.(이는 영국에서 수술실을 operating theatre라고 부르는 근원이 된다.) 몇몇 학자들이 출판한 해부학 교재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가격도 비쌌을 뿐더러 멀리있는 사람들은 카데바를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는 등 여러모로 교육의 효율성이 그리 높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828년에는 카데바 수급에 차질을 빚었던 녹스가 월리엄 버크와 월리엄 헤어라는 연쇄살인범들과 카데바를 암거래하여 해부하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버크는 교수형당했고, 그에게 살해된 사람들처럼 해부되는 신세가 된다. 그의 골격은 오늘날까지 에든버러 의과대학 해부학 박물관에 남아있다. 헤어는 추방당했으며, 녹스는 학계에서 쫓겨나는 등 여러 고초를 겪었지만 런던으로 이주해 이래저래 해부학자로서 체면치레는 간신히 하다 자연사했다.][* 참고로 이 사건을 각색한 영국 영화 버크 앤 헤어가 있다. 버크 역은 [[사이먼 페그]]가, 헤어 역은 [[앤디 서키스]](!)가 맡았다. 사족으로 희생자들 중 하나가 [[크리스토퍼 리]]인데, 리와 서키스가 각각 [[반지의 제왕]]의 사루만과 골룸으로 나와서 사루만을 죽인 골룸이라는 배우 개그가 성립한다(...). 정작 두 캐릭터는 원작이나 영화나 만난 적도 없다는 게 함정.] 녹스의 사건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시신 밀수는 당대 급격한 도시화로 슬럼화된 대도시들에서 불법적인 일을 손대는 갱단이라면 당연히 하는 것이었을 정도로 성행해 해부학 교수는 이런 밀수된 시신들과 대부분 연관될 정도였다 [* 물론 윤리의식의 성장에 따라 시신 밀수는 점차 사라졌으며, 오늘날 해부학 교육에 쓰는 시신은 모두 적법한 절차를 거쳐 기증받은 것만 사용한다.]. 다만 이러한 불상사에도 불구하고 해부학의 발전은 멈추지 않으며, 이런 광범위한 해부에 대한 욕구와 열정들덕에 19세기 후반에 이르렀을때는 해부학은 거의 완성될 정도였다. 현대에 넘어와서는 해부학을 교육 목적으로 실습하는 수준이고 아주 특이 케이스가 아닌 이상 인체에 대해서 인류는 물리적 구조에 대해서는 통달했다고 봐도 된다.[* 물론 물리적 구조, 기계적 원리에 대해서 알았다는 것이지 질병의 영향이나 뇌가 담당하는 정신적 영역은 아직도 미지의 영역이다. 이것은 해부로 알아낼 수 있는 부분이 사실상 아니기 때문.] 1858년에는 헨리 그레이가 포괄적인 (comprehensive) 해부학 서적 '''그레이 해부학(Gray's anatomy)'''[* [[그레이 아나토미|동명의 드라마]]는 Gr'''e'''y로 쓴다.]을 출판한다.[* 상술했다시피 19세기는 해부학이 부흥한 시기로 여러 해부학자들이 포괄적인 해부학 서적을 출판하였으나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그레이가 유일하다.] 헨리 반다이크 카터가 하나하나 꼼꼼히 스케치한 그림과 함께 상세한 설명을 단 이 서적은 오늘날까지도 여러 번 개정을 거치며 해부학의 고전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우리 나라는 1885년 제중원 의학당에서 최초의 해부학 교육을 시행하였으며, [[6.25전쟁]] 중인 1952년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교실[* 당시는 부산의 [[전시연합대학]]이 막 해산된 시기였다.]에서 국내 최초의 해부학 서적을 출판한다. 현대에는 [[컴퓨터 그래픽]] 기반의 3D 해부학 모델이 등장하면서 의학 교육에 보조적으로 쓰이고 있으며, 향후 [[가상현실]] 및 [[증강현실]]과 결합되어 수술 등 다양한 분야에 확장될 것으로 기대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