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햇볕정책 (문단 편집) === [[동방 정책]]과의 비교 === 우선, 두 정책을 추진한 [[빌리 브란트]]와 [[김대중]]이라는 인물 사이에도 많은 유사점들이 있다. 빌리 브란트는 사생아로 태어나 정치에 뛰어들기 이전 반 나치 투쟁에 뛰어들어 망명생활을 이어갔다. 냉전시대 분단국이었던 서독에서, 그것도 동독으로 둘러싸인 서베를린이라는 변방에서 정치가 생활을 시작했다. 김대중은 서자로 태어났고 빌리 브란트의 경우에서처럼 정치의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호남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2022년 현재까지도 유일한 호남 출신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또 정계 입문 이후 투옥과 연금, 사형선고, 두 차례의 망명[* [[김대중 납치 사건]],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문서 참고] 등 시련을 겪었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빌리 브란트는 초국가주의 유럽통합 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전쟁과 전체주의 독재 체제의 원인을 민족주의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의 일환으로써 유럽통합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것을 의미했으며, 우선적으로 서독과 서유럽에서 민주주의를 더욱 심화시키고 이를 동독과 동유럽에 전파하는 것을 핵심으로 봤다. 이를 위해 동독을 비롯한 동유럽의 나라들과 화해, 교류, 협력 정책을 펼쳐나가고자 하였다. 이후 소련을 시작으로 해 본격적으로 동방정책이 추진됐으며, 서독-동독 간 정상회담과 유엔 동시 가입, 외교관계 체결 등의 성과도 얻었다. 자세한 내용은 [[동방정책]] 문서로. 김대중은 6.25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평화의 가치를 깨달았고, 남북 관계도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봤다. 남과 북이 서로를 인정하고 평화적으로 교류 및 협력하면서 점진적으로 통일을 달성한다는 구상이다. 실제로 1971년 2월 3일 미국 내셔널프레스 클럽 기자회견에서 이 3단계 통일방안을 설명하면서 빌리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을 지지하고 공감한다는 말을 한 바 있으며, 이후로도 다수의 연설 등에서 언급하는 등 대북정책을 정립해 가면서 동방정책의 큰 영향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방정책은 통일의 방안이 아닌, 통일을 먼 미래의 과제로 설정하고 그 미래를 위한 준비로서 통합과 평화에 초점을 맞췄다. 반면 햇볕정책은 한반도의 분단 자체가 부당한 것으로 생각해 일찍이 통일을 위한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3단계 통일과정[* '남북한의 평화적 공존 - 평화적 교류와 교섭 - 평화통일' [[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520247?sid=100|#]]]의 첫 번째 단계[* [[베를린 선언]]에서는 "현 단계에서 우리의 당면목표는 통일보다는 냉전종식과 평화정착이다."라고 선언했다.]로서 기능한다. 이처럼 두 정책의 탄생 배경과 분단을 바라보는 시각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유사한 신념과 세계관을 관통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