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햇볕정책 (문단 편집) ==== [[김대중 정부]]의 통일론 ==== 김대중 대통령 후보 측은 이전 정권과의 차별성을 위해 남북문제에 능통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내세웠다. 이는 점차 유화정책에 호의적이 된 [[빌 클린턴 행정부]]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클린턴 행정부가 유화적이기만 한것은 아니었다. 유럽 코소보 사태에는 무력 공습([[코소보 전쟁]])을 감행했으며,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도 한때 [[대북 선제 타격]]을 계획했으나 한국의 막대한 피해가 우려되어 그만뒀다고 [[https://www.nocutnews.co.kr/news/20382|자서전]]에서 언급한바 있다.] 하지만 집권여당 [[새정치국민회의]]는 [[자민련]]과의 연합정부를 구성하고 있었고, 임기 시작부터 [[IMF 사태]] 수습 등으로 당장 유화정책을 추진할 수는 없었다. 북한 역시 이 정책을 남한의 흡수통일 전략으로 간주하고 이를 경계했다. 특히 햇볕정책 추진에 앞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취임후 자신의 대북정책에 대한 주변국들의 지지와 공조를 확보하는 사전 작업에 임했었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공조와 함께 [[김대중 오부치 선언|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이래 일본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한 공조를 확보했으며[* 일례로 [[문재인 정부]] 시기를 보면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종전선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던 상황이었다.[[https://n.news.naver.com/article/052/0001139475?sid=104|#]] 하지만 [[북미정상회담]]에서 이를 이행하지 않았는데, 보좌관이었던 [[존 볼턴]]의 회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과 만나 종전 선언을 하려고 했으며 볼턴은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종전 선언’에 대한 대가로 북한으로부터 핵무기나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한 기준선 선언 등을 포함해 무엇을 뽑아낼지 논의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일본 [[아베 총리]]가 직접 [[워싱턴 DC]]를 방문해 “북한에 너무 많은 양보를 하지 말라”는 등의 설득을 했고 결국 북미정상회담 공동선언에서 종전선언이 빠졌다고 전했다.[[https://m.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950433.html|#]] 이후 언론에서는 [[미국]]의 대북 정책 결정 과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일본]]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고 '패싱(passing)'한다면 한국 주도의 대북 정책도 힘을 받지 못한다는 지적을 했다.[[https://n.news.naver.com/article/025/0003264113?sid=100|#]]] 중국과 러시아로부터도 지지를 확보했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당시 주변 강대국과 대북 정책에 관한 합의를 본 다음 2000년 남북 정상 회담을 열었고, 외교적으로 포위한 상태였기 때문에 북한이 달리 움직일 공간이 크지 않았다"고 분석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3&aid=0003439135|기사]] 그외 관련기사.[[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492076|<'99 정치 결산>김 대통령의 4강 외교]]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443547|김 대통령 APEC 정상외교]]][* 또한 1999년 작성된 정부문서에 의하면 혹시 모를 북한 급변사태에 대비한 전략도 세웠던 것으로 드러났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2376828|DJ시절 작성된 북한 급변사태 매뉴얼]] 그외 김대중의 [[김대중#s-8.1|북한관련 어록]]도 참조.] 이후 [[2000년]] 3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베를린자유대학에서 "'''[[베를린 선언]]'''"[* "현 단계에서 우리의 당면목표는 통일보다는 냉전종식과 평화정착이다.", "이러한 모든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남북한 당국간의 대화가 필요하다. 우리의 특사 교환 제의를 수락할 것을 촉구한다."는 등의 내용이다.[[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00315&cid=40942&categoryId=33385|베를린선언]]]을 갑자기 발표하면서 순식간에 남북화해와 정상회담이 정치문제 전면에 나타나게 되었고, 6월에는 사상 최초로 [[2000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 그 뒤를 이은 [[참여 정부]]에서도 이러한 기조에 따라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등의 사업을 계속하고 [[개성관광]] 등 새로운 사업도 추가로 시행했다. 그 외에 결과적으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평양]] 관광이나 [[중국]]을 거치지 않는 [[삼지연공항]]을 통한 [[백두산]] 관광도 논의된 적이 있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9&aid=0000107819|#]] 이러한 대북 사업 뿐만 아니라, 국제 체육 대회 남북동시입장과 한정적인 왕래도 주요한 부분이었다. 이때 북한 사절단이 현충원을 참배한 적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