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삼수 (문단 편집) == 생애 == 1936년 [[경상남도]] [[부산광역시|부산부]]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은 부모가 징용당하는 바람에 [[일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당시 보통학교에서 소학교로 명칭이 변경되던 시기.] 때까지 일본에서 살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한국어]]가 서투르고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집안일을 도와야 했기에 또래들보다 [[학교]]에 더 늦게 가게 되었다. 그러나 늦게 시작한 사람이 열심히 하면 무서운 법. [[공부]]에 엄청난 재능을 보이며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부산의 1류 고등학교인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육군사관학교]] 동기이기도 한 [[김진영(군인)|김진영]]과 김진영의 소개로 알게 된 [[허문도]]와 부산고등학교 10기 동기생이다.[* 고등학교 동문이라고 해서 무조건 안면식이 있던 사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소수 정예 학교가 아닌 이상 3년 동안 전교생 얼굴을 다 알고 졸업하는 것도 아니다.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는 [[절친]]으로 묘사되었으며 극 중에서 허삼수는 허문도, [[허화평]]과 반말을 주고 받지만 허문도와 허화평은 서로에게 존대말을 쓴다.] 이후 경쟁률이 37:1에 육박했던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하고 진학해 우수한 성적을 자랑했고 특히 육군사관학교 입학과 동시에 시작했던 [[유도]]는 졸업 당시에 2단을 땄을 정도였다.[* 지금은 고령인 관계로 유도는 그만두었지만 체력 유지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운동을 좋아해서 [[수영]]을 통해 꾸준히 체력 관리를 한다고 한다.] 이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동기인 [[김진영(군인)|김진영]], [[허화평]] 등과 [[하나회]]에 가입하였는데 특히 허화평과 단짝이었다. 이후 방첩대에 들어가 [[윤필용]]을 상관으로 모시게 되었고 허삼수의 능력을 알아본 윤필용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를 적극 추천해 [[월남전]] 방첩장교로 가게 된다. 월남전 참전 당시 [[미군]]의 지원을 업고도 각종 부정부패와 권력형 비리 등으로 몸살을 앓고[* 당시 [[남베트남]]과 지엠 정권의 부정부패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수준이였다. 미군으로부터 원조받은 무기가 다음 날이면 노점상에서 팔리고 있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월맹군에게 얻어 터지던 지엠 정권과 남배트남을 보며 부패가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남베트남에서 뛰어난 성과를 올렸던 허삼수는 [[노태우]]의 처남이였던 [[김복동(1933)|김복동]]에 의해 보안사 인사처장으로 임명되어 [[한국]]으로 돌아왔고 보안사에서도 무능하고 부패한 직원들을 강제 예편시키는 등 [[개혁]]을 단행했다. 1979년 [[10.26 사건]]과 [[12.12 군사반란]] 당시 [[국군기무사령부|국군보안사령부]] 인사처장([[대령]])이었던 그는 12.12 군사반란 당시 육군범죄수사단장 [[우경윤]] 대령과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가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 연행하였다. 5.17 내란이 종료되고 1980년 [[준장]] 진급 및 동시 예편하면서 군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1980년 9월 [[대통령비서실]] 사정[[수석비서관]]에 임명되어 본격적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이후 [[허화평]], [[허문도]] 등과 ''''쓰리 허''''로 불렸으나 1982년 5월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이후 허화평 등과 함께 [[전두환]]의 친인척이 공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것이 허화평과 허삼수의 [[권력]]이 지나치게 세다는 지적이 있어서 1982년 12월 사정수석비서관직에서 경질되었으며 이후 허화평과 함께 [[미국]]에서 체류하였다.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국의 학자들과 학문을 교류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등 학술 연구에 매진하였다. 본인 역시 50살이 넘은 나이에 진지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시간이 참으로 행복했고 정치판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이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후 전두환의 요청으로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정치판에 뛰어들게 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부산직할시 [[동구(부산)|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당시 [[삼김]]을 필두로 한 [[야당]]의 공세와 상대 후보였던 [[통일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선거 전략에 말려들어 낙선하였다.[* [[정치]] 신인이였던 노무현이 허삼수를 "5공 적폐"로 몰며 적극적인 [[흑색선전|네거티브]] 전략을 사용했다. 노무현을 천거했던 [[김영삼]] 역시 "반란군 총잡이"라며 여기에 가세하여 노무현이 당선되는데 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지역위원장을 역임하며 재기를 꿈꾸던 허삼수는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서 노태우와 김영삼의 막강한 지원을 업고 [[민주당(1991년)|민주당]] 노무현 후보에게 설욕하였다.[* 이때 김영삼은 "반란군 총잡이"라며 허삼수를 몰아붙이던 13대 총선에서와 달리 [[3당 합당]] 이후 치러진 14대 총선에서는 그를 "충직한 군인"이라고 치켜세우며 허삼수의 당선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242888|YS, 그의 미친듯한 깜짝쇼가 그리워라]]][* 허삼수 역시 네거티브 전략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노무현을 "말만 많고 능력은 없는 정치인"이라고 깎아내렸다.] ~~하지만 [[재수]] 만에 당선됨으로써 아쉽게도 [[삼수|이름값]] 달성에는 실패하였다~~ 1996년 [[문민 정부]]의 [[12.12 군사반란]] 및 [[5.18 민주화운동]] 관련 역사 바리 세우기 작업으로 기소되었다. 역사가 고꾸라진것도 없었다. 1996년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 [[중구(부산)|중구]]·[[동구(부산광역시)|동구]]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부산고등학교 후배인 [[신한국당]]의 [[정의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동시에 구속되었으며 5.18 재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가 1997년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이후 대통령 특사로 전두환 등과 함께 석방됐다. 석방 이후 국제장애인협회의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지금은 고문으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평생 친구 [[허화평]]이 징역을 계기로 보수 논객으로 전향한 것과는 달리 허삼수의 경우는 장애인을 돕는 사업에 매진하며 정치적으로는 어떠한 의견도 내지 않고 있다. 2014년 내란 전과로 인해 중지된 [[연금]]을 지급해달라고 [[장세동]], [[정호용]] 등과 함께 국가에 소송을 제기한 바 있으며 같은 이유로 서훈이 취소된 훈장 역시 국가에 반납하지 않고 있다. 80살이 넘은 현재에는 근황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