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정 (문단 편집) === 광복 이후 ~ 제1공화국 === 1945년 [[8.15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한국민주당 후보로 [[경상남도]] 부산부(현 [[부산광역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승만의 신임을 받아 [[이승만 정부]]에서 교통부장관, 사회부장관, 6.25 전시 국무총리 서리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1952년까지 국무총리 서리를 지낸 이후 재입각하지 않고[* 허정은 '''서리(서리제 폐지 이후는 내정자)에서 바로 정식 총리가 되지 않았다가, 공백기를 거쳐 나중에 정식 총리가 된 유일한 총리다.''' 역대 총리 서리나 총리 후보자는 1. 인준안이 가결되어 바로 정식 총리가 되거나(인준), 2. 인준안이 부결되어 총리의 꿈을 그대로 접거나(낙마) 둘 중 하나밖에 선지가 없기 때문이다. 서리나 내정자에 그쳤다가 나중에 다시 총리가 된 사례는 허정 총리가 유일하다.][* 물론 훗날 허정이 총리로 취임한 근거는 4.19 혁명 이후 "기존의 수석국무위원은 후임자가 임명될 때까지 국무총리가 되어 국무총리의 직무를 수행한다."라는 제2공화국 개정헌법의 부칙이었다. 이 부칙 때문에 허정 총리는 헌정 사상 유일하게 국가원수의 지명이 아닌 헌법에 따라 자동 취임한 총리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정계에서 물러나 있다가 긴 휴식기 끝에 1957년 12월 14일 [[서울특별시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에는 [[정치]]와 거리가 멀었던[* 허정 이전의 서울시장 5명은 모두 (서울특별시장 취임 당시 기준으로) 국회의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경력이 미약했다. 초대 [[김형민(정치인)|김형민]] 시장은 미국 유학을 다녀와 평범한 [[영어교사]]로 근무하다가 [[존 리드 하지]]와의 인연으로 갑작스럽게 잠시 서울시장을 맡게 되었고 [[윤보선]], [[이기붕]]은 서울시장이 정치 데뷔 무대였다. [[김태선]] 시장은 내무부 치안국장을 지낸 경찰공무원이었고 치안국장 외에는 서울특별시장 1, 2차 임기 중간에 [[내무부장관]] 고작 1달 맡은 게 다였다. [[고재봉]] 시장도 [[대통령비서실장|경무대 비서실장]]과 [[서울특별시 부시장]] 외에는 특별한 경력이 없었다.] 서울시장직이었기에 제헌 의원과 이승만 정부에서 장관 3번, 국무총리 서리 등 고위직을 지냈던 허정이 임명되자 '''거물시장'''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서울시장 재임 중의 에피소드로, 야당 의원이 시장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오자 "깡패 같은 놈!"이라고 불같이 호통을 치면서 수위들을 불러 시청 밖으로 패대기쳐 쫓아낸 일이 있었다고 한다. 1959년 5월 [[필라델피아]] 시장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하여 [[뉴욕]], [[시카고]] 등 여러 도시들을 시찰하였다. 미국 방문 후 한국으로 귀국한 다음 날인 6월 12일 갑작스럽게 경질되었는데 이 배경에 서울시장으로서 [[자유당]]에 협조하지 않아 친[[야당]] 성향이라는 자유당 강경파의 공격이 있었다는 관측이 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909020023910102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9-09-02&officeId=00023&pageNo=1&printNo=11621&publishType=00010|#]] 1959년 8월 10일 한일회담 수석 대표로 임명되었는데 이 시기 일본의 [[재일교포 북송]] 문제로 한일관계가 경색된 터라 회담의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