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젠 (문단 편집) === [[국민당의 1차 북벌]] === [[국민당의 1차 북벌]] 시작 이후 탕성즈의 지휘 아래에 장사를 점령했으며 호북성을 공격했다. 또한 아편 재배를 많은 수익을 거둬들이는 악서에 2사단을 거느리고 주둔하여 8군의 세력 확장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군량미 조달을 위해서 현지의 농민들과 크게 충돌하였는데 농민들이 무력을 동원하여 군미 동원을 저지하는 등 차차 농민운동과 척지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에 접근하려는 탕성즈의 지시에 따라서 대체적으로 노농운동에 대해 불간섭하며 중립을 지켰다. 1927년 2월 초 8군 산하에서 35군과 36군이 확대 개편되어 독립할 때 35군 군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영한결렬 이후 우한 국민정부의 지배구역에서는 농민협회와 총공회가 앞뒤를 가리지 않는 급진적인 토지개혁과 폭동을 일으키면서 토지를 보유한 사람은 정치성향이 어떻게 되었던 간에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죽이거나 고문했는데 허젠은 그 자신이 중소지주 출신이기 때문에 토지위원회에서 급진적 토지개혁을 주장한 [[마오쩌둥]]을 [[왕징웨이]], [[탄옌카이]]와 함께 비판했다. 허젠은 4월 23일 중국국민당 토지위원회 심사위원회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현재 토지 몰수 문제는 이미 문제가 안되지만, 분배의 방법에 문제가 있다. 토지 몰수 후 정부 혹은 당부에 귀속시키는 것은 반드시 분규를 야기할 것이고, 만약 농민협회에 귀속시키면 분규는 더 커진다. 병사들에 관한한 (...) 만약 병사의 토지를 모루하면 병사들이 작전을 수행할 정신을 동요시킬 수 있다. 본군의 병사 및 관장의 대부분은 토지를 소유한 사람이므로 이러한 현실적 상황을 마땅히 주의해야 한다." 5월 13일, 북벌군이 3로로 나누어 하남에 대한 진격을 시작했고 평서 전투가 벌어지자 탕성즈는 허젠엑 즉시 지원할 것을 명령했고 허젠도 응하여 북상했다. 우한의 북벌군은 6월 초에 카이펑, 정저우를 점령하여 [[펑위샹]] 부대와 조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