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헌제 (문단 편집) === 부정적 === 중근세까지의 중국에서는 위의 선양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리고 현대 기준으로도 헌제의 양위는 위에서 말하는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양위'''가 결코 '''아니었다.''' 선양의 밑밥이 깔리는 과정에서 헌제의 가족과 주변인들이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엄청나게 죽어나갔다. [[헌제귀인 동씨|헌제의 아이를 임신한 후궁]], [[효헌황후 복씨|삼보의 난 때부터 20년 가까이 동고동락한 황후]], 그 황후가 낳은 어린 자식들까지. 외척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헌제 본인만 안 죽였을 뿐이다. 또한 실제로 이 소위 "평화로운 선양" 덕분에 황제를 협박해 신하가 황제가 되는 일이 잦아지자 이런 행위의 기틀을 세운 조조가 간신의 대명사가 되어 망탁조의의 한 명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망탁조의]]라 매도하면서까지 이를 역적의 행위로 본 이유는 헌제가 살아있을 당시엔 한의 [[복권]]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위에서 예를 든 [[남북조시대]] 유송의 선양과 비교하면 안 되는 게, 유송 때는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나라 자체가 [[막장]]이었고 왕조의 역사도 50년 정도 밖에 안 되는 단명 왕조였다. 당연히 백성들의 유송에 대한 감정도 매우 차가웠고 유송이 망할 때 반발하는 이는 드물었다. 이 때문에 유유와 달리 [[소도성]]이 굳이 유송의 황족들을 몰살시킨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유유의 경우 동진의 공제 사마덕문이 만만치 않았고 동진의 치세가 고착되어 있어서 반발이 심했다. 따라서 동진 복권 운동이 일어날 수도 있어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세워진 유송이 워낙 막장이라서 소도성이 굳이 몰살을 시키지 않아도 유송이 복권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헌제는 달랐다. [[한고제|유방]]이 세운 한은 400년의 세월 동안 중국인들을 강하게 묶어놓았고[* 현대 중국에서도 주류 민족을 '한족(汉族)', [[표준중국어]]를 '한어(汉语)', 글자는 한대에 정립되어 '한자(汉字)'라고 일컫는 상황이다.] 황실의 힘이 약화되자 너도나도 황실 복권을 부르짖으며 자체적으로 [[반동탁연합]]이 일어났다. [[동탁]]의 전횡으로 황실의 권위가 약화되었으나 혼란과 군벌의 피튀기는 난립은 낙양의 동쪽인 하북지방에만 한정되었고[* 원소, 조조, 공손찬, 동탁, [[여포]], [[도겸(삼국지)|도겸]], [[원술]] 등이 이 지방의 군벌들이었다.] 서량의 옹주와 양주, 서남의 익주와 교주, 중원의 형주는 겉으로나마 황실에 순응하며 조용했다. 조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조가 동탁을 추격하다 [[서영(삼국지)|서영]]에게 할아버지 조등이 환관으로 재직하며 모아두었다 넘겨준 권력과 군사를 모두 잃은 후, 막장이 되어 1,000명 정도의 군사만을 가진 채 하내에서 [[원소(삼국지)|원소]]에게 객장으로 있을 때 조조를 재기시켜준 것이 역적 [[동탁]]을 끝까지 치려 한 진정한 한의 충신이라며 조조를 찾아 몰려든 [[순욱]] 등의 모사들과 군병들이었다. 또한 비슷비슷한 일개 군벌 중 하나에 불과했던, 특히 원소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조조가 갑자기 하북의 천하이강이 된 것도 헌제를 허창으로 데려와 한실의 이름을 등에 업은 후부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조는 [[유유(송무제)|유유]], [[소도성]], [[양무제|소연]], [[진패선]] 등과는 다르다. 이들은 처음부터 썩을 대로 썩은 전 왕조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며 이를 토대로 자체적인 힘을 길러 군과 신과 백성들의 지지하에 전 왕조를 무너뜨리고 선양을 받아 새 왕조를 창업했다. 하지만 조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왕조라는 소에 붙어 그의 피를 빨아들였다. 이 당시 한 왕조엔 아직도 한을 그리워하는 많은 충신이 있었다. 특히 조조가 위공에 오르려하자 당시 조조군의 최고 중책이었던 [[순욱]]이 자살해버린 것은 당시 한나라에 충성하는 명사들이 많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며[* 당시 조조 세력 내 순욱의 위치는 제갈량 이상이었다. 유비 세력 내에서 제갈량이 유비의 행보에 태클을 걸다 못해 자살해 버린 격. 자세한 건 [[순욱]] 문서를 참조하면 된다.] 조조가 결코 쉽사리 헌제를 죽일 상황이 아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거기다 한나라를 부흥하자는 논리나 반 조조 세력의 궐기는 한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계속 되었다. 당장 218년, '''한실 부흥'''을 외치는 [[유비]]와 관우를 끌어들여 조조를 역적으로 선포하려 한 경기, 위황의 난으로 수많은 한나라 중신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 다음해에는 [[관우]]가 쳐들어오자마자 예주, 사례, 심지어 업에서도 들고 일어나기 때문에... 이렇듯 한실의 저항은 후한이 완전히 망하는 전해인 219년까지 계속된다. 위의 기반이 확실히 닦였다고 보려면 조비의 위왕 즉위 후 동생들 정리하고 [[구품관인법]]으로 한나라 신하들까지 포섭하는 단계까지 가야했다. 이걸로 '''세습 왕조'''가 가능하다는 걸 입증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조차 [[소칙]]이나 [[조식(삼국지)|조식]]은 한이 멸망하고 헌제가 죽임을 당했을 거라고 생각하여 상복을 입고 곡을 하였고[* 정사 삼국지 소칙전의 기록은 이렇고 주석 위략에는 조식의 경우 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조조의 총애를 잃은 것을 한탄하면서 곡을 했다고 한다. 그럴 거면 상복은 왜 입었는지 의문이긴 하지만.] 이런 소문이 촉에까지 퍼져 유비가 칭제하는 명분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마저도 헌제가 선양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인식이 이미 퍼져 있던 것이다. 거기다가 소칙은 이렇게 곡을 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불쾌해 하는 조비에게 바른 소리를 하려다가 그대를 논한 게 아니라[* 조비는 조식의 소문만 들은 상태였다. 안 그래도 얼마후 조비에게 찍혀 좌천당하고 병이나 병사한 소칙인데 만약 이런 얘기를 들었다면 더더욱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는 [[부손]]의 말에 저지되기까지 했다. 조씨를 따르던 신하들조차 이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헌제를 말 그대로 죽이지만 않았다 뿐이지 조조는 헌제를 충분히 핍박하였고 상술된 것처럼 잘 대해준 것이 결단코 아니다. 당장 복 황후를 죽일 때 아직 미성년자일 헌제의 두 아들도 조조에게 독살당하여 죽었고, 동귀인은 헌제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죽었으며, 일가는 모조리 조조의 손에 멸족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딸들을 헌제에게 시집보내[* 황후와 빈] 조조는 스스로 국구가 되었다. 헌제 앞에서 칼을 차고다니는 등 헌제를 핍박한 사실이 정사기록으로 남아있으며, 헌제의 가족들이 모조리 끌려가 참살당할 때 헌제에게 구명을 간청하자 헌제가 '''"내 목숨도 건사하기 힘드오."'''라고 말한 정사 기록이 남아있다. 모범적인 선양을 주장하는 근거는 단 하나 "헌제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다'''."는 것뿐이며 그 헌제조차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몰라 불안해했다는 것. 또 흔히 왕조 멸망기의 황제는 무능한 경우가 많지만, 헌제는 재위 기간 내내 꼭두각시에 머물렀고 제대로 된 통치를 할 기회는 단 한 번도 없었으므로 애초에 그가 황제로서 유능한 인물이었는지 그렇지 아니 하였는지를 알 수 없었으므로 그에게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자신이 권력을 전횡했다는 점 역시 비판될 수 있다. 한편으로 백성들에겐 종친이라는 이유만으로 유비를 따라 길을 나설 정도로 한 왕조를 재건해야 한다는 분명한 의식이 있었고, 영웅 호걸들은 한의 이름을 표명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지지를 받았다. 때문에 한실은 동탁의 손에 권위가 추락했으나, 지속될 수 있었고, 잘하면 다시 화려하게 복위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 역량을 조조가 한의 보호자인양 행세하며 몰래 빨아들이고 동귀인과 복 황후 등을 죽이고 헌제의 옆에서 황실의 권위를 천천히 망가뜨려가면서 최악의 형태로 한은 무너져내렸다. 물론 조조는 황제 자리에 직접 오르지 않고 실권자로 머물렀지만 [[조비|그 아들]]이 황위를 찬탈하도록 판을 깔아놓은 것은 언제까지나 조조. 그 때문에 후세의 역사가들은 조조를 까면 깠지 조비는 그렇게 심하게 까지 않는 것이다. 훗날 후조를 창건한 창업 군주 [[석륵]]이 조조와 사마의를 평가하며 "나는 [[조조|조맹덕]] 부자나 [[사마의|사마중달]] 부자처럼 고아나 과부를 속이며 간교한 술책으로 천하를 빼앗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 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또한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 받으면서 헌제를 죽이지 않은 것을 무리하게 옹호하지만, '''불편한 진실은 고대부터 삼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선양한 황제가 죽은 기록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특히 [[요순시대]]의 선양이 역사의 실존이 의심된다하나 그거는 어디까지나 현대에 그렇다는 것이지 그 시대 각종 기록들에 요순시대의 선양이 자주 언급되는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은 [[요순시대]]의 선양을 명백히 있었던 것으로 믿고 있었으며, 모범적인 선양의 예로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비 입장에서는 별다른 이유 없이 고대부터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은 전통을 깨고 헌제를 죽이기에는 걸리는 것이 많았을 것이다.[* 자세한 것은 [[망탁조의]] 문서로.] 일본이나 한국의 사관과는 달리 중국 사관은 아직도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이는 위나라가 불과 몇대 만에 망하고 이를 이은 진나라도 통일을 이룩한 후 불과 10여 년 만에 힘을 잃고 30여 년 만에 망한 데서 기반한다. 역성 혁명은 기본적으로 기존 국가가 하늘의 뜻을 잃어 더이상 백성을 다스릴 힘이 없어 백성을 괴롭게 하니 신왕조를 세워 난세를 편안히 하겠다는 것이 골자인데. 위·진나라는 난세 종식에 완벽히 실패하여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 후 최악의 [[오호십육국|헬게이트]]를 열었기에 그 명분이 매우 떨어지는 것. 이러한 난세는 무려 589년까지 계속 되며, 중국 역사상 역성 혁명은 무수히 일어나왔지만. 이러한 장기간의 대난세를 연 것은 중국 역사를 통틀어 이때가 유일하다. 한마디로 조조가 정권을 잡는다는 면에서 보면 성공한 [[역성혁명]]이나 백성 입장에서 보면 '''실패한''' [[역성혁명]]이었기에 비난을 받는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진나라의 멸망은 조조 80년 후인데 그 책임을 조조에게 묻는 것은 너무 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명확히 해야 할 것은 그가 난세를 열었다는 것이 아니라 역성 혁명을 일으켰음에도 난세를 종식시키는 데 실패하였고 그가 세운 왕조와 후계가 오히려 수습될 수도 있었던 난세를 조장했다는 점이다. 당장 남북조시대를 개판으로 만들었던 [[청담사상]], [[구품관인법]], [[문벌귀족]]의 발호는 조조가 세운 조위 정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고, 남북조시대가 개판이 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너도나도 나야말로 한나라의 (혹은 위 또는 진나라의) 정통 후계자라고 난립하였다는 점인데. 형식상으로나마 한황실이 살아있었다면 이러한 난립이 없었거나 최소한 축소되었을 것이다. 거기에 국내에서는 삼국지 연의의 영향으로 (다른 삼국지 군웅도 그러하지만) 그와 그의 위나라가 지나치게 높게 평가 되는 경향이 있는데. 실은 그의 위나라는 역대 [[역성혁명]]을 일으킨 왕조 중에서 중앙 집권의 정도나 국력이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었다. 되려 최하위에 머무르는 수준이었고, 중앙 집권 정도가 약했기에 조조 사후 30년도 채 안 되어, [[고평릉 사변]]으로 말그대로 사마의의 꼭두각시 정부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실제로 위나라를 보면 거의 '''비정상적인 수준'''으로 자주 반란이 일어난다. 고평릉 사변을 비롯하여 관구검, 문흠의 난, 제갈탄[* 제갈량과 제갈근의 조카. 덕분에 제갈량이 살아있을 때는 한직에 머물렀다.]의 난, 종회[* [[강유]]를 한중에서 묶어두어 [[촉나라]]를 멸망시킨 2인방 중 하나. 강유의 꾐을 받아 독립(?)을 노리다 참살당한다.]의 난, 공손연(요동 태수)의 난 등 불과 30년도 안 되는 기간에 수많은 반란이 일어났고, 황제도 신하에 의하여 2번이나 갈렸다. 역대 이 정도로 불안했던 왕조는 중국 역사를 통틀어 찾기 힘들 지경. '''진나라의 조기 멸망은 이미 위나라 때부터 그 조짐이 강하게 보였던 것이다.''' 아무튼 진나라도 위나라를 멸망시킨 후 (그리고 오를 병합한 지) 얼마 못 가 망하니 난세 종식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중국인이 자신을 한족이라고 칭하고, 조조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워낙 이 [[오호십육국|헬게이트]]가 괴로웠던 시기 였기에 [[나름]]대로 평화로웠던 한나라를 그리워 했던 때에서 기인한다. 그래서인지 실제 이 난세를 겪지 않은 일본이나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조조에 호의적인 의견도 많지만 중국에서는 재평가론이 일기 전까지 조조에 부정적인 의견이 많은 편이었고 이후 중국 문학계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한 조조의 재평가 이후로는 호의적으로 보는 의견과 맞물리는 편이다. 여담으로 국내에서는 유독 조조의 악역 이미지가 순전히 삼국지 연의 때문에 생긴 거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훨씬 이전부터 조조의 악역 이미지는 굳어 있었고, 나관중 또한 그런 성향을 그대로 따라 조조를 악역으로 그린 거지, 악역 이미지는 그가 창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관중은 조조를 입체적인 면모를 지닌 개성있는 악역으로 묘사해줬기에 나관중의 삼국지 연의를 기점으로 조조 재평가 바람도 불 수 있던 것이 가능했다.] 또한 당시의 백성들은 조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조조가 살아 있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흔히들 조조의 나쁜 이미지는 후세에 성리학으로 인해 만들어 졌다거나, 남송 때 촉나라에 동질감을 느껴서라고 '''착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조조가 벌인 학살[* 대표적으로 [[서주대학살]]이 있다.], 가혹한 정책으로 조조의 이미지는 이미 바닥이었고 그 결과 장판파 전투 직전에 10만 명의 백성이 조조를 피해 유비를 따라갔고, 바로 후대인 위진남북조 시대의 가십 등을 정리한 책인《[[세설신어]]》에서 조조의 이미지가 이미 매우 부정적으로 굳어 있다는 것은, 상층부라면 모를까 백성들에게 조조의 이미지는 조조가 살아 있을 때도 매우 안 좋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며, 남북조 초기에 노예에서 황제까지 오른 인생 역전의 주인공인 [[석륵]] 또한 조조를 간교한 술책이나 부리는 자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등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석륵은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황제까지 올라온 자이기 때문에 당시 민심을 잘 반영하는 황제지만 정작 석륵도 도덕성과 관련해서 조조를 비판할 자격은 없는게 낙양에서 도망치는 피난민 10만 명을 몰살한게 석륵이다.] 당장 [[남송]]이 되기 전인 [[북송]] 시대의 기록을 보면 >민가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집안이 아주 가난하더라도 조금씩 돈을 모아 옛날 이야기를 들으러 간다. 삼국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어 유현덕이 패하여 어려움에 처하면 눈물을 흘리다가, 조조가 패하는 이야기가 시작되면 만인이 아주 즐거워한다.[* 보면 유비는 자로 부르고 조조는 쌩이름으로 부른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로써 군자와 소인의 영향은 백 대를 지나도 끊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塗巷中小兒薄劣,其家所厭苦,輒與錢,令聚坐聽說古話。至說三國事,聞劉玄德敗,顰蹙有出涕者;聞曹操敗,即喜唱快。以是知君子小人之澤,百世不斬。) >---- >소동파(蘇東坡)의 지림(志林) 권1, 도항소아청설삼국어(塗巷小兒聽說三國語)에서 이런 기록이 있는데 '''조조에 대한 백성들의 민심은 남송이나 성리학과 전혀 관계 없이 이미 시궁창'''이었다는걸 알수 있다. 반면 백성들과는 다르게 상층부는 시성인 두보가 자신의 벗 조패의 공을 기리는 시에서 "영웅 위 무제의 후손"이라고 칭찬하는 등 조조에 대한 시선이 일방적으로 나쁘지는 않았는데 당태종이 조조를 매우 싫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걸 보면 반반이었던 듯하다. [[금나라]]의 침공으로 강남으로 밀려나 촉나라와 동질감을 느낀 [[남송]] 즈음부터 이미지가 나빠졌으며 명분에 죽고사는 [[성리학]]으로 인해 조조는 완전히 간웅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또한 조조의 적인 [[관우]]나 [[제갈량]]을 모시는 관제묘나 [[무후사]] 등이 이미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지어지기 시작했으며, 중국인들이 자신을 한족이라고 칭하기 시작한 것도 송나라보다 훨씬 이전이다. 더불어 송나라 이후의 작품이지만 삼국지평화 같은 작품을 보면 조조는 훨씬 더 잔혹하고 찌질하게 나온다. 이런 [[삼국지평화]]의 과도하게 악역적인 조조적 이미지는 '''민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라고 하며, 이를 보면 백성들에게 조조의 이미지는 [[삼국지연의]] 이전부터도 매우 안 좋았던 듯하다. 솔직히 서주 대학살만 놓고 봐도… 이를 볼 때 조조의 이미지는 적어도 백성들에게는 오랜 시대에 걸쳐 매우 안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니 선양에 대한 인식도 자연스레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