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헌제 (문단 편집) === [[조조]]의 꼭두각시[anchor(협천자령제후)] === 기껏 이각, 곽사 등의 억압자로부터 자유를 찾아 고생하며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뤄양|낙양]]에 도착하였으나 [[조조]]에게 사실상 옹립된 헌제는 당시 그저 그런 일반적인 군웅 수준의 세력[* 헌제를 얻기 이전까지의 조조는 거대한 원소의 하북 세력에 붙어있던 여러 군웅 중 하나에 불과했다.]을 가지고 있던 조조에게 '''황실의 보호자'''라는 강력한 명분적 무기를 제공하였고, 이는 조조의 세력이 급격히 팽창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 이 당시 여러 군웅들 중에 '''헌제를 옹립해야 자신이 살아남는다고 생각한 군웅은 조조와 [[손책]], 이 둘 뿐이었다.''' 그래서 손책은 한 황실 조정을 습격하여 헌제를 조조로부터 구출해서 자신이 옹립하는 프로젝트를 수립했으나, 실행에 옮기기 전에 죽었다. 원소는 동탁 따위가 옹립한 놈은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며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시도했고, 유우만 승낙했다면 훨씬 우수한 명분과 권위를 얻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유우 본인이 원소의 제의를 스스로 고사하고 그냥 자신의 관할지인 유주에 계속 남은 것. 이후 유우는 [[공손찬]]에게 살해당하였다. 당연히 원소 입장에선 이후에 헌제를 옹립하려고 하면 명분이 완전히 꼬여버리기 때문에 헌제를 옹립할 수 없게 된 상황이다.] 이는 처음에는 일종의 윈윈 관계였으나[* 헌제는 동탁이 소제를 살해하고 앉힌 황제라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 다른 제후들이 괜히 헌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오히려 은근히 다른 황족을 천자로 내세운 게 아니다. 동탁 사후 이각, 곽사의 난으로 근위 세력도 소멸하여 실권도 명분도 다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여차하면 다른 제후들이 내세우는 황족에게 권위가 완전히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조조의 군사력을 의지하여 헌제 자신의 권위도 어느 정도 회복이 가능해졌다.] 조조의 권세가 날이 갈수록 높아져 가면서 결국 일방적인 관계로 변질되게 된다. 처음의 조조는 거의 맨손이다시피한 채로 [[이각]]과 [[곽사]]로부터 탈출한 헌제를 옹립하면서 사재를 털어 헌제를 대신하면서 조정의 문무백관들에게 급여를 주는 등 뭔가 기반을 다져주는 것 같아 보였으나 이 과정에서 조조의 마음속에는 탐욕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헌제는 조조의 본거지인 [[쉬창|허현]][* 허창이란 지명은 훗날 조비가 선양을 받은 뒤의 지명이다.]으로 이사간다. 연의에서는 헌제가 "낙양이 폐허가 되었고 내가 있는 허현이 아주 좋으니 그쪽으로 도읍을 옮기자."는 조조의 말에 이각, 곽사 때와 같은 꼴이 난다며 매우 근심해하지만, 거의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천도하여 허현으로 가게 된 것으로 묘사되었고, 정사에서도 진동장군(鎭東將軍) 조조(曹操)가 스스로 영(領) 사례교위(司隸校尉),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었고 후에 헌제를 허현(許縣)으로 천도케하며 스스로 사공(司空)이 된 것으로 나온다. 허현은 이후 허도로 불리며 후한이 망할 때까지 도읍으로 남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근대 국가들에서 괜히 진짜 절실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천도]]를 최대한 꺼린 게 아니다. 헌제와 조조의 사례와 같이 이런 식의 뜬금없는 천도가 강행될 때는 항상 그 이면에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한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 조조의 손에 허도로 봉대된 이후 곧 헌제는 모든 권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국가의 대소사는 사실상 조조가 모두 처리하게 되었고 당시 헌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조조가 가져온 문서에 인을 찍는 것뿐이었다. 관직 임명부터 각 제후들에 보내는 황명까지 모두 조조의 손을 거쳤으며 실제 당시 다른 군웅들 역시 헌제가 보낸 칙서는 곧 조조의 뜻으로 여기곤 했다. 연의에서는 사냥터에서 조조에게 활을 빌려주었다가 조조가 헌제의 활로 사슴을 쏘아 죽이자 백관들이 헌제가 맞춘줄 알고 칭송한다. 그러나 조조는 "아, 그거 제가 맞힌 건데요?" 하고 굴욕을 주거나, 칼찬 조조가 헌제 자리에 앉은 명장면도 나온다. 하지만 이는 최소한 [[구석]] 특전을 받은 이후의 일이므로 매우 과장된 것이다. 그러나 헌제가 실권을 장악한 조조를 경계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헌제는 자신이 만 20세가 되는 200년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버틸 수가 없다]]!"'''를 외치며 실권을 장악한 조조를 [[암살]]하려고 계획하지만[* 《[[삼국지연의]]》의 '''의대조 사건'''이다.][* 《[[정사 삼국지|정사]]》에서도 거의 비슷한 표현이다.《선주전》에 따르면 [[동승]]이 [[유비]]에게 이르길, "황제(= 헌제)의 의대(衣帶)를 받으니 그 속에 조조를 주살하라는 밀조(密詔)가 있었다."고 했다.] 일이 누설되어 실패한다. 이 일로 인해 헌제가 어릴 때부터 그를 모시던 [[동승(삼국지)|동승]]을 포함한 대부분의 조신들은 삼족에 걸쳐 파리처럼 죽어나갔으며[* 연의에서는 암살 모의를 누설한 [[노비]] 진경동은 이후 등장하지 않아 어떻게 되는지 나오지 않는데, 대부분의 2차 창작물에서는 조조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 노비를 죽인 이유는 한마디로 "주인을 무는 개는 살려둘 수 없다."는 것이다.] 임신하고 있던 [[헌제귀인 동씨|동귀인]][* [[삼국지연의]]에서 '''동귀비'''로 나오는 인물. [[정사 삼국지]]에선 '''동귀인'''으로 나온다.]까지 헌제가 보는 앞에서 살해되었다. 헌제 자신도 목숨이 위험한 판국이라 눈물만을 흘릴 뿐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유비]] 또한 이 거사에 가담했는데, 원소의 대군과 연대하고 스스로의 본거지인 서주의 군대 등을 동원해 조조를 토벌하려 한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조조의 친정군에 서주를 뺏기고 부하들을 잃고 원소에게 의탁하게 된다.[* 드라마《[[삼국(드라마)|삼국]]》에도 같은 묘사가 나온다.] 즉, '''의대조 사건'''은 [[관도대전]]의 발발 요인 중 하나가 된다. [[진수]]의《[[정사 삼국지]]》에 보면 유비가 한중왕 즉위와 관련하여 헌제에게 올린 표문에서도 "의대조 사건"과 관련하여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한중왕표]] 문서로.] 조조는 원가를 멸망시키며 [[중원]]에서 가장 강한 [[제후]]가 되었고, [[적벽대전]] 이후에도 이 권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에 헌제를 협박해 위공의 위를 받고 헌제를 구석에 박아놓은 채 스스로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황제를 무시하게 된다. 이에 [[효헌황후 복씨|복 황후]]와 그 [[외척]] 세력이 황제 복권을 위해 조조 암살 계획을 세우다 들키자 조조는 황궁에 군사 500을 보내 궁벽을 무너뜨린다. 복 황후는 벽을 부수고 쳐들어온 조조군에게 산발이 된 채 머리를 잡혀 끌려나와 매맞아 죽었고 조신 200여 명이 살해당했으며, 헌제의 두 아들도 독살당했다. 이때 헌제는 앉아 떨고 울면서 살려달라는 복 황후에게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르거늘."이라고 하였다. 이후 죽은 복 황후를 대신해 조조의 딸 [[헌목황후 조씨|조절]](= 헌목황후)을 강제로 황후로 맞는 등 완전히 [[꼭두각시]]로 전락하였다. 또한 조절의 자매들인 [[조헌(후한)|조헌]]과 [[조화#s-2]]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조헌과 조화는 이후 어떻게 됐는지 전혀 안 나왔지만 조절은 계속해서 헌제의 아내로서 그를 따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