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헌제 (문단 편집) ==== 암살 루머 ==== 그런데 [[촉한]]에서는 헌제가 선위한 후 조비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잘못된 소식을 바탕으로 220년 효민황제(孝愍皇帝)라는 시호를 올렸고, 221년 [[유비]]는 한나라의 계보를 잇는다는 명목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촉한측의 단순 착각이었는지는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 220년 위나라의 조비가 황제가 되었으니, 촉한에서는 유비 또한 위나라를 맞상대하기 위해 황제의 자리에 올라야 한다는 중신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촉한의 유비는 한나라 황제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나라 이름까지 한나라라고 했었다. 한나라 헌제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유비가 칭제를 선언한다면 이는 스스로 건국의 명분을 짓밟는 것이었고, 한나라에 대한 반역이었다. 때문에 촉한 측에서는 헌제가 죽었다는 거짓 소문을 내고 유비가 황제에 자리에 올랐으리라 여기는 경우도 많다. 헌제가 사망했다는 이야기는 유비가 황제에 오를 명분을 가져다 주었으며 "헌제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유로 익주민들을 동원하는 데에도 좋은 구실이 되었다. 어쨌거나 당시 [[위나라]]에서도 [[소칙]]이나 [[조식(삼국지)|조식]]이 헌제가 죽었다고 여기고 곡을 했으며, [[이릉대전]] 당시 유비에게 보내는 [[제갈근]]의 편지에 '폐하께서는 [[관우]]와의 친분과 '''돌아가신 황제'''[* 한 헌제 유협을 말한다. 강남에서도 조비가 유협을 살해했으리라는 인식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와의 관계를 비교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헌제를 죽은 사람 취급하고 있었으므로 적어도 선양한 지 1~2년 사이에는 헌제가 정말 죽었을 수도 있다는 소문이 어느정도는 퍼져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몰랐을 가능성은 없는데, 왜냐하면 224년 [[제갈량]]이 쓴 [[편지]]에 의하면 4년 후에도 촉 사람들은 헌제가 조비에게 [[살해]]당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한의 황제였던 인물인 데다가 선양한 이후에도 봉토를 갖는 제후의 신분이었다. 조비가 헌제의 신병을 비밀리에 구속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런 주요 인물의 행방을 4년 동안이나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무리 정보 전달이 느렸던 고대 사회라고 해도 상식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촉한에선 위나라 항장 출신 강유가 재상직까지 꿰차고 있었다. 다만 이러한 착각이 촉한의 내부 결속력을 다지는 것에 도움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실제로 224년 제갈량이 썼다는 편지는 관리를 등용하기 위해 쓴 것이다. 의외로 후한의 황제 중에서는 2번째로 장수했고 재위 기간도 2번째로 길었다.[* 둘 다 1위는 '''[[광무제]]'''다.] 그렇다고 헌제가 특별히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건 아니고 이 정도로 후한의 황권이 막장이어서 그렇다. 사실 헌제의 재위 기간은 31년 정도로 긴 편이었으나 스스로 통치한 기간은 이각과 곽사에게서 탈출한 뒤 조조의 손에 권력을 잃을 때까지 극히 일부 기간이었다. 그나마 그 기간에는 이미 [[군웅할거]] 기간이 개막한 상태라 전국에 그의 황명이 전달된 기간은 전혀 없다고 봐도 좋다. 헌제는 [[고제(전한)|초대 유방]]부터 따지면 29번째 황제이며, [[후소제(후한)|유변]]을 포함한 [[전소제(후한)|소제]] 4명과 창읍왕, 정안공을 빼면 23번째가 된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디스전으로 [[왕랑#s-1]]을 분사시킬 때 "저승에서 무슨 면목으로 한실의 스물네 분 황제를 뵈려 하느냐?"는 말을 하는데 이건 유비를 포함한 것이다.[* 다만 이 말을 할 때 헌제는 엄연히 이 세상 사람이었다는 게 개그 포인트다. 심지어 [[제갈량|그 말을 하는 장본인]]과 생몰년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인데, 당연지사다.] 헌제가 사망한 뒤 산양공의 작위는 장남인 남양왕 [[유풍]](劉馮)이 200년에 이미 요절한 연고로 손자인 [[유강#s-2]](劉康)이 서진의 건국까지 보고 태강 6년(285년)에 사망할 때까지 51년을 이었고, 다시 유강의 아들 유근(劉瑾)이 태강 10년(289년)에 사망할 때까지 4년을 이었으며, 계속해서 유근의 아들 유추(劉秋)가 계승했으나 영가 3년(309년)에 벌어진 [[영가의 난]]에 말려 피살되면서 일족이 흩어져 소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