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종(고려) (문단 편집) == 개요 == >夫子曰, ‘有始有卒, 其惟聖人乎!’ 則我后之功高德冠, 絶于古今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시작과 마침이 한결 같은 것은 오직 성인뿐일 것!’이라고 하시었으니 우리 임금의 높은 공과 빼어난 덕은 고금에 다시 없을 것입니다.''' >---- >'''〈[[현화사비]]〉''' >修政公平, 寘民安輯, 內外底寧, 農桑屢稔. 比之周之成·康, 漢之文·景, 亦無愧矣. >'''공정하게 나라를 다스려 국민을 안정시키고 화합을 이루니 온 나라가 평안해지고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현종의 치세야말로 [[주나라]]의 [[성왕(주)|성왕(成王)]], [[주강왕|강왕(康王)]]과 [[한나라]]의 [[문제(전한)|문제]], [[경제(전한)|경제]]에 [[문경지치|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 >'''《[[고려사]]》 - 최충의 논평''' [[고려]]의 제8대 대왕. [[묘호]]는 '''현종'''(顯宗), [[시호]]는 '''원문대왕'''(元文大王), 휘는 순(詢), 자는 안세(安世), [[승려]] 시절의 [[법명]]은 선재(禪齋), 즉위 전 봉호는 대량원군(大良院君)이었다. [[태조(고려)|태조]] 왕건의 손자이자 [[안종(고려)|안종]] 왕욱의 아들이다. [[한국사]]에서 유일한 [[사생아]] 출신 군주로, 죽음의 위기에까지 몰렸던 불우한 어린 시절로 유명하다. 태어나자마자 [[여요전쟁|암울한 전란]]의 시대를 살았고, 몇 년 뒤 [[고아]]가 되었으며, [[협박|생명의 위협]]을 받던 중 [[강조의 정변]]으로 즉위했다. 이후 [[요나라]]의 두 차례에 걸친 [[여요전쟁|대침공]]을 맞아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속에서 [[몽진|남쪽으로 피난을 떠나는 등]][* 제2차 여요전쟁 때 [[통주 전투]]의 참패 이후.] 큰 시련을 겪었으나, 결국 요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제3차 여요전쟁]]때의 금교역 전투, [[귀주 대첩]].]. 전쟁의 위기를 극복한 것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여러 제도의 기틀을 확고히 다지는 탁월한 업적을 쌓았다. 이러한 치적에 힘입어 고려는 제8대 현종에서 제17대 인종 때까지 무려 130년이 넘게 지속되는 기나긴 황금기에 접어들었으며, 동아시아 3국(고려 - 거란 - 북송)간 (균형적) 국제관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나라로 거듭났다. 또한 이후 고려 왕실이 현종의 혈통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고려 왕조의 [[중시조|중흥지주]]에 해당하는 인물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