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현종(고려) (문단 편집) == [[묘호]] 및 [[시호]], 존호 == * 묘호: '''[[현종]](顯宗)''' * 태묘 악장: [[성조(동음이의어)#聖祖|성조]](聖祖), [[열조]](烈祖) * 불천위: [[세종]](世宗) * 시호: 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 공식 묘호는 '현종'(顯宗)이다. [[시법]]에서 '현(顯)'은 "업적이 나라 안팎으로 널리 알려졌다."는 의미다. 태조 왕건의 능호 [[현릉]]도 이 '현' 자다. [[최충헌]] 집권기인 제21대 희종 4년, 7묘 9실 종묘 제도를 정비할 때, 혜종과 현종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제2대 혜종은 태조의 장남으로서, 제8대 현종은 중흥군주로서 모두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결국 희종은 혜종, 현종 두 사람을 '[[문경지치]]'를 이룩한 [[문제(전한)|전한 태종 문황제 유항]], 한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룩한 [[무제(전한)|전한 세종 무황제 유철]]에 비유해 모두 [[불천위]]로 정했다. 제25대 [[충렬왕]]의 <시책>에 의하면 현종은 '''만사불천지종'''(萬祀不遷之宗)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23대 고종 41년 [[고려궁지|강도]]에서 태묘 제사를 지낼 때 올린 <책문>에서는 현종을 '''[[세종]]대왕'''(世宗大王)이라 칭했다. 공식 시호는 '''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이다. 장자 [[덕종(고려)|덕종]](제9대)이 첫번째 시호를 '원문'(元文)으로 올렸다. 이후 셋째 아들 [[문종(고려)|문종]](제11대)이 재위 10년([[1056년]])에 '대효'(大孝), 고손자 [[인종(고려)|인종]](제17대)이 재위 18년([[1140년]])에 '덕위'(德威), 7대손 [[고종(고려)|고종]]이 재위 40년([[1253년]])에 '달사'(達思)를 추증했다. 고려 군주들의 시호 중에는 처음 올려진 두 글자 시호가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현종의 묘호와 시호를 같이 부를 때는 '현종 원문대왕'(顯宗 元文大王), 사서 중 《[[고려사]]》 <현종 [[세가]]> -총서-, 《[[동국통감]]》에서는 줄여서 '현종 원문왕'(顯宗 元文王)이라고 한다. 《[[동문선]]》에는 9대손인 충렬왕이 아버지 [[원종(고려)|원종]](제24대)을 태묘에 제사지낼 때 현종에게 시호를 추가로 올렸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쓰인 <죽책문>에는 '''현종 성렬대왕'''(顯宗 聖烈大王)이라는 [[존호]]가 나온다. 현종 재위 13년인 1022년에 세워진 '사자빈신사지석탑'엔 '성왕항거만세'(聖王恒居萬歲) 즉 >'성왕(聖王)께서 아주 오랜 세월(萬歲) 동안 (천하에) 문제없이 거주하길 바랍니다.' 라고 하며 그의 장수를 기원했다. 역시 현종 재위 중에 세워진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엔 현종을 [[천자|'만승'(萬乘)]]이라 하고, 그의 뜻을 '천심'(天心), 은혜를 '제택'(帝澤)이라고 표현했다. 현화사비에선 '만승'(萬乘), 독특하게 '제천(諸天)이 수호하는 인왕(人王)'으로 묘사되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6000198576_20090309.jpg|width=100%]]}}} || || '''{{{#670000 선릉 전경}}}'''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