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혜령군 (문단 편집) == 여담 == * 행실은 별로 좋지 못한 편이었다. 어릴 때부터 교만하고 방자한 성격에 공부를 게을리하고 놀기만 좋아했다고. 남의 기생 첩을 빼앗지를 않나, 종학[* 宗學. [[조선시대]]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위하여 세운 특수 교육기관.]에서도 행패를 부리지를 않나. * 1430년([[세종(조선)|세종]] 12년) 새해 첫날에 열린 [[조회]]에서, 혜령군이 동갑내기 이복형제인 [[온녕군]]과 함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홀#s-7|홀]]로 신의군[* [[태조(조선)|태조 이성계]]의 3남 [[익안대군]]의 손자. 온녕군과 혜령군의 [[5촌]] 당조카이다.]의 양관(梁冠)[* [[조복#s-4|조복]]을 입을 때 쓰는 금관.]을 때렸고 그러자 화가 난 신의군이 온녕군의 양관을 걷어차 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종부시[* 종친들의 잘못을 규탄하는 일을 맡던 관서.]에서는 도리어 신의군을 탄핵했다. 아무리 혜령군과 온녕군이 잘못했다해도 당조카가 어떻게 당숙의 관을 걷어찰 수 있냐는 것이었다. 결국 신의군은 한성 밖으로 쫓겨났고 그의 [[종]]과 [[노비|관노비]], [[하인]]들은 몰수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201014_001|#]] * 같은 해 6월에는 종학에서 온녕군과 크게 싸웠다. 종부시에서는 이를 지적했고 [[세종(조선)|세종]]은 그의 직첩과 관노비와 땅을 모두 거둬들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206018_001|#]] 직첩은 몇 달 뒤에 돌려받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212114_003|#]] * [[경회루]] 연못에 빠져 죽을 뻔했다가 마침 근처에 있던 [[문종(조선)|이복조카]][* 나이차이는 7살밖에 되지 않았다. 세종이 17살에 문종을 낳았고 혜령군은 세종보다 10살 아래였기 때문.]가 구해줘서 살아난 일화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