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국전쟁 (문단 편집) === 반원 세력의 합작 === 한편 2차 혁명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쑨원]]은 2차 혁명의 실패 이유가 통일된 영도력의 부재 때문이라 생각하고 1913년 9월 도쿄에서 중화혁명당을 조직하여 왕통, [[다이지타오]], [[천치메이]], [[장제스]], [[장런제]] 등 혁명가들을 입당시켰다. 1914년 6월 22일 쑨원은 도쿄에서 간부선거회를 통해 중화혁명당 총리로 선출되었고 7월 8일 200여명을 소집하여 중화혁명당 성립대회를 개최하였다. 9월 1일 중화혁명당 성립이 대외적으로 공표되었고 총무부장에 [[천치메이]], 당무부장에 [[쥐정]], 군무부장에 [[쉬충즈]], 정치부장에 [[후한민]], 재정부장에 [[장런제]]를 임명하고 각 성에 지부를 수립했다. 중화혁명당의 당원은 곧 1만명에 이르렀고 이들은 국내에서 중화혁명군을 조직하고 위안스카이의 부하들을 향한 테러를 감행함으로 토원운동을 전개했다. 쑨원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던 [[황싱]]은 미국으로 외유하였다. 한편 일본에 있으면서 중화혁명당에 가입하지 않은 혁명가들이 통일공화당, 국민당 온화파들을 규합하여 일본에서 구사연구회를 조직했다. 정당의 이름이 아니라 연구회의 이름을 취한 것은 자신들이 중화혁명당에 대립적인 조직이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미국에 있는 황싱에게 구사연구회 가입을 촉구했고 황싱이 수락하면서 황싱이 구사연구회를 지도하게 되었다. 이들은 언론을 통해 반 위안스카이 선전을 하고 위안스카이의 매국행위 폭로와 반원단체들의 규합을 호소하였다. 이 때문에 진보당, 서남의 반 위안스카이 실력자들, 중화혁명당을 비롯한 다른 반정부 세력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쑨원은 황싱에게 공동으로 위안스카이를 타도하자고 제안했고 황싱이 쑨원의 합작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구사연구회와 중화혁명당은 합작을 하게 되었다. [[량치차오]]의 진보당은 처음에는 위안스카이를 지지했으나 위안스카이가 황제에 즉위하려 하자 이에 반대했다. 1915년 9월에 들어 량치차오는 맹렬한 군주제 반대 운동을 전개했고 홍헌제제 이후에는 [[루룽팅]]의 초청으로 광서 지역으로 이동해 위안스카이에 대항하는 군사 행동을 촉구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리례쥔, 이근원, 여지 등 특정 정당에 소속되지 않은 구국민당 인물들도 토원을 주장하며 반 위안스카이 대열에 합류했고 신해혁명 때 운남에서 봉기했던 운남도독 [[차이어]] 등이 량치차오의 영향으로 강경히 토원을 주장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차이어의 세력을 위협적이라 여겨 차이어를 베이징에 불러 사실상 연금시켰으나 차이어는 자신의 부하 출신인 운남장군 [[탕지야오]]와 암호전보로 긴밀히 연계하며 궐기를 준비하게 했고 11월 11일 베이징을 탈출해 톈진의 일본인 병원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일본인으로 가장하여 타이완, 홍콩, 하노이를 거쳐 12월 19일 운남성의 성도 쿤밍에 도착했다. 탕지야오 등 실력자들도 합류하여 위안스카이에게 제제 취소를 요구하고 위안스카이가 응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위안스카이를 토벌하기로 결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