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국전쟁 (문단 편집) === 반원세력의 확대 === 한편 호국군이 사천군을 격파하고 호남성 귀양에 이르자 귀주호군사 유현세가 1916년 1월 27일 귀주성의 독립을 선포했고 2월 1일 1군 동로군이 사천성 납계를 점령했다. 사천군 유존후가 호국군에 합류했고 사천성 기강, 호남성 황현, 마양, 지강 등이 잇달아 호국군의 손에 들어갔다. 이 와중에 위안커딩이 위안스카이를 속이기 위해 순천시보를 날조해왔다는 사실까지 들통이 나면서 위안스카이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2월 23일 위안스카이는 황제에게 올리던 문건들을 받지 않겠으며 운남의 사건을 평정하기 전까진 즉위하지 않겠다고 각국 공사들에게 통지했다. 위안스카이가 파견한 북양군은 사천에서 물자가 부족했던 호국군을 격퇴하여 서부, 납계, 기강 등을 점령했다. 하지만 호남 전선에서는 여단장 당천희가 혁명군에 가담하고 사령관 마계증이 병환으로 사망하는 등 북양군이 밀렸다. 당천희의 배반 소식을 들은 위안스카이는 격노해서 날뛰었지만 주문병이 호국군을 강타하여 호남 서부에서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곧 반란을 평정할 수 있겠다고 기뻐했지만 3월 15일 귀주선무사로 파견된 루룽팅이 호국군의 기세를 보고 량치차오의 설득을 받아 휘하의 [[천빙쿤]], [[탄하오밍]]을 이끌고 광서성의 독립을 선포했다. 이는 루룽팅이 위안스카이가 용제광, 용근광 형제를 지원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결과였다. 광서의 독립에 북양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펑궈장과 돤치루이 등 제제 반대파들은 계속 물자를 요구하며 태업을 일삼았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원충추를 서주에 파견해 [[장쉰]]에게 출병을 요청했다. 하지만 완고한 복벽파였던 장쉰은 선통제를 옹호하며 위안스카이의 즉위를 질타했다. 여기에 [[펑궈장]], [[리춘]], [[진윈펑]], 주서, 탕향명 등도 제제에 반대한다는 보고를 받은 위안스카이는 절망하여 자신의 집안에서 59세를 넘은 사람이 없으니 58세인 자신도 곧 죽을 것이라고 부르짖었다. >"끝장이야! 모든 게 끝장이야! 어젯밤에 하늘에서 큰 별이 하나 떨어지는 걸 봤어. 이건 내 평생에 두번째로 본거야. 처음 봤을 때는 [[이홍장]]이 죽었어. 이번에는 아마 내 차례일 거야." [[쉬스창]]이 편지를 보내 지금이라도 제제를 취소하면 돌이킬 수 있다고 조언하자 3월 17일 위안스카이는 양사기를 불러 대책을 논했다. 양사기는 군주제 취소만이 평화적인 해결이라고 밝혔고 위안스카이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황제에서 물러나서도 총통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 때문에 위안스카이는 [[쉬스창]]을 국무경으로 삼아 육군총장 [[돤치루이]]와 함께 중앙 정치를 맡기고 량스이를 시켜 차이어와의 화해를 모색했다. 이어 량치차오에게 운남과 광서를 설득해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캉유웨이]]에게도 량치차오를 설득해달라고 부탁했다. 위안스카이는 그 사이에 입법회의를 통해 군주제 철회와 더불어 총통으로의 재선출을 노리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