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위청 (문단 편집) == 설명 == [[용호영|용호청]]과 함께 내삼청을 형성하였으며, [[국왕]]의 근접 [[호위]]를 맡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정공신들이 모집해 거사에 이용했던 군사들로 조직되어 있었기 때문에, 반정공신 주축의 군사적 세력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어느 면에서는 왕권 견제의 구실을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중앙군 강화를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시작은 [[인조반정]] 당시 동원되었던 [[사병]]들을 [[반정]]이 성공한 이후 반정 [[공신]]들에게 나누어 분속시킨 것이며, 이것이 확장되어 [[금군]]과 함께 조선의 [[친위대|친위군]]을 형성한 것이다. 총 3청이 존재하였으며, 각 [[청]] 하에는 350명의 [[군관]]들이 존재하였다.[* 설치 당시는 ‘호위4청’이라 하여 반정에 공로가 가장 많았던 이서(李曙)·김류·이귀·신경진(申景禛) 등을 대장으로 임명하고, 각각 100명의 군관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 밖에 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은 당상관이라 하여 각 50명의 군관을 거느리게 했다. 그 수는 모두 500명으로, 국가에서 급료를 지불하였다.] 여타 군영들과 다르게 [[지휘관]]은 호위대장[* 대개 시·원임대신 및 국구(國舅) 중에서 겸하였다.]으로 정 1품 고위직이었으나, 명예직에 가까웠고 실질적인 지휘는 정 3품의 호위별장이 담당하였다. 조선 중후기 [[서인]]의 무력기간을 형성하였으며 [[정조(조선)|정조]] 연간 숙위소를 설치하고 [[장용영]]으로 대체시키면서 1청으로 축소되었으나 정조 승하 후 400여명으로 회복되었다. 실제로 급료를 받는 군관은 400명 중 95명이었으며, 이외에도 뇌자 10인, 순령수 10인, 등룡군 10인, 표하군 12인, 사후군 6인, 장막군 6인이 있었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오군영, version=214, paragraph=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