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홀로코스트 (문단 편집) == 배경 == [[반유대주의]]적 음모론을 기반으로 한 [[나치즘]]을 바탕으로 [[아돌프 히틀러]]는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하자 유대인들을 향한 탄압과 차별을 제도적으로 도입했다. 1933년에는 유대인들이 운영하는 사업에 대한 국가적 보이콧이 이뤄졌고, 1935년 도입된 [[뉘른베르크 법]]을 바탕으로 유대인을 향한 법적 차별이 가해졌다. 이러한 전국적 차별 아래 1938년 [[수정의 밤]] 등의 반유대적 폭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유대인]]과 [[롬인]]을 몰아넣은 구역인 [[게토]]가 형성되어 사회적 배척과 격리가 이뤄졌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독일이 동쪽으로 확장하며 [[특수작전집단]]이 동유럽 점령지의 유대인과 정치범들을 학살하는 역할을 맡아 총 130만여명의 민간인을 사살했다. 또한 나치 독일의 점령지와 파시스트 동맹국들의 영토에 강제수용소가 지어졌으며, 이곳에 수감된 유대인들은 열악하고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강제 노동에 투입되어 과로사, 아사, 병사하였다. 1942년 [[반제 회의]]에서 '최종 해결책'으로서 모든 유대인의 절멸이 결정됨에 따라 수감자들은 가스실을 이용한 방법을 중심으로 하여 대량학살되었다. 그러한 강제 노동·절멸 수용소로는 나치 점령 폴란드에 설치된 [[아우슈비츠]],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마이다네크]], [[소비보르]], [[헤움노 절멸수용소|헤움노]] 등이 있었다. 이러한 공식적 기소와 학살은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대인 외에 [[나치당]]이 보기에 [[우생학]]적으로 열등한 자들, 혹은 반(反)나치즘적이라고 여겨진 사람들 또한 함께 기소 및 학살되었다. 그러한 예로 1938년 시행된 [[장애인]] 학살인 [[T4 작전]]의 경험을 거친 인력들이 [[독소전쟁]] 발발 이후 홀로코스트에 본격적으로 투입되었다. [[폴란드인]] 등 슬라브족 또한 학살당하여 약 180~190만명의 비유대계 폴란드인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en/article/polish-victims|"Polish Victims"]]. Holocaust Encyclopedia.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소위 [[집시]]라고 불리는 롬인들도 주요 학살 대상 중 하나였으며, 최대 50만여명이 학살되어 유럽 롬인의 절반 가량이 사망하였다.[*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en/article/genocide-of-european-roma-gypsies-1939-1945|"Holocaust Encyclopedia – Genocide of European Roma (Gypsies), 1939–1945"]]] 연합군이나 레지스탕스의 [[포로]], 특히나 유대인, 슬라브인, 유색인 포로의 경우 현장에서 처형되거나 강제 노동·절멸 수용소로 보내졌다. 나치당을 정치적 이유로 거부한 [[공산주의자]] 등의 정치범들도 함께 학살되었다. [[게이|남성 동성애자]]를 위시한 [[성소수자]]들 또한 학살 및 수감되었고, 생존한 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동성애]]를 불법화한 동서독 정부에 의해 나치의 기록을 바탕으로 '''다시 수감되었다.''' 이러한 나치의 기소에 의해 사망한 총 희생자의 수는 홀로코스트로 사망한 유대인 600만여 명을 포함하여 약 1,100만명이다. 좀 더 넓게 정의할 경우 [[독소전쟁|동부전선]]에서 군사작전 중에 죽은 민간인을 제외한 나치 점령지에서 조직적으로 학살당한 소련인까지 포함해 약 1,700만명까지 추정하기도 한다.[* A figure of 26.3 million is given in Service d'Information des Crimes de Guerre: Crimes contre la Personne Humain, Camps de Concentration. Paris, 1946, pp. 197–198. Christopher Hodapp, Freemasons for Dummies, 2005; Raul Hilberg, 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 2003; Martin Gilbert, Atlas of the Holocaust, 1993; Israel Gutman, Encyclopedia of the Holocaust, 1995.] 이를 기획하고 주도적으로 학살한 주체는 [[히틀러]]를 주축으로 한 [[나치 독일]] 정부와 그 군대임이 분명하지만, 그 외의 [[추축국]]들이나 추축국의 괴뢰국, 점령지의 자생적인 파시스트들로 이루어진 나치 독일의 괴뢰 정권과 '풀뿌리 부역자들' 또한 학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직접적으로 살인에 관여되지 않은 독일의 단체나 민간인들 또한 반유대주의에 깊게 경도되어 유대인을 향한 차별, 탄압, 추출 등 학살에 참여했다. 유대계 미국인 사학자 마이클 베렌바움은 "독일 교회와 내무부는 유대인들의 출생기록을 제공하였고, 우체국은 추방과 시민권 박탈 명령을 배달했으며, 재무부는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독일 기업들은 유대인 노동자를 해고하고 유대인 주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다."라고 기록했다.[* Berenbaum, Michael (2005). 《The World Must Know: The History of the Holocaust as Told in the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ISBN 978-0801883583.] 또한 대학교는 유대인 교수 해고, 철도 회사는 수용소행 열차 운영, 화장(火葬) 회사는 수용소의 대규모 화장터 지원, 제약 회사는 수감자를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 참가 등 학살에 대한 대규모 동조가 이뤄졌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구조적 악이 나치의 전체주의를 기능하게 했다는 [[악의 평범성]]을 주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강제 노동·절멸 수용소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며 그 실상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근대의 첨단이었던 서구 기계 문명의 기술력과 행정력이 철두철미하게 특정 부류의 인간을 말살한다는 발상에 쓰였다는 사실은 전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홀로코스트는 역사적 반면교사로 남게 되었다. 이에 1945년 종전 이후 [[유엔]]의 [[세계 인권 선언]]이 1948년 발표되는 등 인권 수호와 차별 반대라는 국제적 합의가 맺어졌다. 현재의 독일연방공화국은 학살의 주범인 나치가 민주적인 절차로 정권을 장악했다는 점을 들어 [[방어적 민주주의]] 운영에 적극적이며 [[홀로코스트 부정론]]이 위법이다.[* 오향미 (2011). “독일 기본법의 "방어적 민주주의" 원리 : 그 헌법이론적 논거의 배경”. 《의정연구》 (한국의회발전연구회).] 또한 일부 사학자들과 철학자들은 [[모더니즘|인간의 이성과 기술력의 발달을 통한 낙관적인 미래]]라는 관점을 철저하게 부정시켰다는 점에 있어 [[제2차 세계대전]]을 [[근대|모던]]과 [[포스트모던]]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점으로 삼으며, 철학자·사회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야만이다"라고 말한 바 있듯 [[실존주의]], [[비판 이론]],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현대 인문학 사조에 큰 영향을 준 계기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