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성군·예산군 (문단 편집) == 개요 == 1988년 [[13대 총선]]부터 [[지역구]]가 소선거구제로 개편된 이후, [[홍성군]]은 [[청양군]]과 함께 선거구를 공유하였고, 상대적으로 인구가 많았던 [[예산군]]은 단독 선거구로 유지되어 오다가, 2004년 부로 [[17대 총선]] 때 홍성군·예산군 선거구로 개편되어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청양군은 [[부여군]]과 같이 [[선거구]]를 구성해 오다가 이후에는 둘 다 [[공주시]]와 새로이 손을 잡으면서 [[공주시·부여군·청양군]]으로 재편되었다.] 예산군, 홍성군 모두 8~10만 급의 군치고는 큰 고을이라서 2021년 현재 253개의 지역구 중에서 '''2개의 [[군(행정구역)/대한민국|군]]으로만 구성된 선거구는 이곳이 유일'''하다.[* 인구 하한선인 139,000명을 넘어서 단독 선거구를 구성하고 있는 [[달성군]], [[울주군]], [[기장군]]을 제외하고는 상당수 군들은 인접 [[시(행정구역)/대한민국|시]] 지역과 통합하거나 주변의 2~3곳의 시·군과 통합 선거구를 구성하고 있다.] 현 국회의원은 [[국민의힘]] 소속의 [[홍문표]] 의원이다. 2010년대 초반까지 [[충청남도]]에서 가장 [[대한민국 보수정당]] 지지세가 강한 지역이'''었'''으며[* [[충청도]] 지역에서 보수정당(자민련 - 선진당 등 충청계 보수 세력과 신한국당 - 한나라당 - 새누리당 등의 전국구 보수 세력 모두를 포함) 지지세가 가장 강해온 지역들(홍성군, 예산군, [[단양군]])은 [[수도권(대한민국)|수도권]] 출신 이주자들이 거의 없으며, [[전라도]]와의 교류가 적은 특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신행정수도 공약을 내세운 [[노무현]] 후보의 영향으로 충남 전체에서는 [[민주당계 정당]]이 승리했던 [[16대 대선]]에서도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이 승리했을 만큼[* [[15대 대선]]에서는 예산군에서만 한나라당이 '''565표(0.96%)'''차로 신승했다. 홍성군에서는 민주당계 정당의 [[김대중]] 후보가 승리.], 진보 진영이 거의 발을 디디지 못했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부터 [[내포신도시]]의 입주가 시작된 후 젊은 [[공무원]]들과 그 가족들의 이주가 많아지면서 조금씩 [[더불어민주당]] 등의 범 진보 진영이 '''홍성군을 중심'''으로[* 2021년 현재 내포신도시 인구의 대부분은 홍성 지역(남내포) 중심이며, 예산 지역(북내포)의 인구는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2020년 5월 부로 예산도 개발로 인해 인구가 점차 늘고 있는 상황.] 지지세를 올리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마저도 [[7회 지선|최근의 지방선거]]에서 [[기초의회]]와 [[도의회]]에서 일부 소득을 얻는 데 그쳤다. 정계 은퇴를 번복하고 다시 복귀를 선언했던 [[이회창]]이 자신의 부계(친가) 대대로 [[고향]]에 선영(묘소)도 있는 이 곳(예산)에서 마지막 정치 활동을 재개하였다.[* 태생이 [[황해북도]] [[서흥군]]이나, 일제강점기 관리였던 아버지의 임지 중 하나일 뿐 특별히 [[황해도]]에 대한 기억은 없다고 한다. 반대로 외가가 있는 전라도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서울특별시]]로 상경해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를 졸업해서 딱히 어느 한 곳을 고향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단, 유일하게 [[경상도]]와 연이 하나도 없었고, 그게 단점으로 작용했는데, 15대 대선에서는 주요 세 후보 중 경상도 출신이 하나도 없어서 경상도 표를 당시 범여권 독자 후보였던 [[이인제]]와 나눠 먹었고(심지어 이인제도 고향이 충남이었던 데데가, [[DJP연합]] 때문에 충청도 표까지 세 후보 모두에게 유의미하게 나눠졌다.), 16대 대선에서는 도리어 상대 민주당 측 후보 [[노무현]]이 [[PK(동음이의어)#s-4|PK]] 연고인 바람에 표를 일부 뺏겼던 게 두 대선 모두의 패인에 상당히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참고로 이회창은 [[15대 총선|지난 두 번의]] [[16대 총선|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로 출마해 1번으로 [[당선]]되었고, 두 번 모두 대선 출마를 이유로 사퇴해 제대로 의정 활동을 한 적이 없었다. 15대 대선 이후인 1999년 [[1999년 재보궐선거|6월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긴 했지만, 관련 문서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