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헌제제 (문단 편집) === 국민대표대회 === 10월 8일[* 혹은 10월 18일.] 위안스카이는 <국민대표대회 선거법>을 공표하였고 10월 10일 국민들에게 문제 해결을 위해 조용히 기다리라는 명령을 발표했다. 국민대표대회 준비는 위안스카이 부자와 측근들이 선출, 투표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지휘했다. 10월 25일 선거가 시작되어 11월 20일 대표 선출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11월 28일 국체 결정 투표가 행해졌는데 각 성의 장군과 순안사들이 각 성에서 투표를 진행하고 그 표를 베이징에 보냈는데 투표장이 일단 각 성의 장군과 순안사의 관서였으며 투표장마다 군경이 경호한다는 명목으로 병사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감시원들이 투표를 감시하였다. 그리고 대표들에게 거마비라는 명목으로 500원이 지급되는 등 정상적인 투표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투표가 시작되자 제제를 부추기던 일본과 영국이 태도를 바꾸어 체제 개혁을 늦추라고 했고 러시아도 동참했다.10월 28일 오후 일본, 영국, 러시아 공사들이 합동으로 외교총장 [[루정샹]]을 만나 군주제 추진을 연기할 것을 권고했다. >"중국의 제제복귀가 급속히 추진되고 있는데, 중국에는 지금 이에 반대하는 소리가 자뭇 높아지는 현상이다. 만약 제제가 실행된다면 뜻밖의 사태가 발생할 위험이 크다고 본다. 중국에서 만일 불행한 사태가 발생된다면 그것은 중국과 관계를 가진 각국으로서도 매우 염려되는 일이다. 따라서 위안스카이 대총통은 현명한 조치를 취하여 제제의 실행을 잠시 연기함으로써 환란의 발생을 미연에 방지해주기 바란다. 우리가 중국에 이같은 권고를 하는 것은 결코 중국의 내정을 간섭하자는 뜻이 아니라, 다만 극동의 평화를 위해서이다. 11월 1일 위안스카이는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중국의 제제주장은 꽤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정부는 계속 이것을 거부해왔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이 주장이 날로 강화되고 있기 때문에 만약 정부가 이를 강압한다면 커다란 문제가 발생될 것이다. 정부는 지금까지, 인민들의 국체변경을 위한 입법원에 대한 청원 등에 대하여 아직은 그 시기가 아니라고 언명해왔다. 그러나 중국의 약법에 의하면, 주권은 국민 전체에 속해 있고, 국체문제에 대해서도 정부는 국민의 여론에 따르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치안문제에 대해서도, 각 성은 민의에 따라 국체문제를 해결한다면 문제가 발생할 까닭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어 프랑스와 이탈리아도 [[루정샹]]에게 군주제 추진을 늦추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듣지 않았다. 어차피 미국이 불간섭주의를 추구하여 뭐라 말이 없던 것도 있었고 열강들도 [[제1차 세계 대전]] 때문에 정신이 없었을 뿐더러 위안스카이를 적대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2월 11일 참정원에 전국 국민대표 1993명의 표가 모였다. 그리고 1993명 전원이 군주제에 찬성했다. 이어 각 성에서 위안스카이를 황제로 추대하자는 옹립서가 올라왔는데 여러 성에서 올라온 문서가 모두 내용이 같았다. 이는 위안스카이의 측근 주계검이 두 차례에 걸쳐 각 성에 미리 지시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어 양탁과 손육군이 참정원이 각 성의 총대표로 위임받아 국민대표대회 총대표 이름으로 추대서를 올리자고 제안했다. 이어 현장에서 비서장 임장민이 추대서를 낭독하고 참석한 대표 전원이 기립하여 만장일치로 '삼가 위안스카이 대총통을 중화제국 황제로 추대하여, 국가최상이며 국가최고의 주권을 봉정한다'라는 결의를 통과시키고 해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