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헌제제 (문단 편집) === 황제에 오르다 === 12월 11일 정오, 위안스카이에게 황제에 올라달라는 추대서가 올라왔다. 위안스카이는 오후에 이를 거절하는 화답을 보냈다. ||중화민국의 주권은 전체 국민으로부터 온 것이다. 국민대표대회에서 표결하여 입헌군주제로 고친 이상 본 총통은 이를 반박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본인에게는 충분한 공적이 없다. 신해혁명 전에는 정계의 요직에 앉아 이미 승하한 황제를 따랐지만 부끄러움과 후회가 많다. 그런데도 제위에 오른다면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는가? 이는 도덕적으로도 부끄러운 일이다. 중화민국 초기에 있는 힘을 다하여 공화정을 세우겠다고 참의원에 맹세도 했다. 오늘 만약 황제가 된다면 이 맹세를 저버린 것이니 신의를 저버리게 된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추대하기 바란다.|| 이에 오후 5시, 참의원이 다시 개회하여 15분만에 총 2600자에 달하는 장문의 추대서를 만들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추대서에는 위안스카이의 여섯가지 공적을 거론하며 도덕적 문제와 신의 문제가 없다고 부추겼다. 12월 12일 아침, 위안스카이에게 추대서가 도착했고 위안스카이는 마침내 국민의 열성적인 요청을 거절할 수 없다는 구실을 대며 제위를 승인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오늘날 국민들이 공화제에 염증을 느끼고 군헌으로 나가고 있다." 이에 5개국 대표는 더 이상 반대하지 못하고 장래의 일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12월 13일 위안스카이는 백관들의 하례를 받고 12월 14일 각 부와 행정기관에 제제로 바꾸는 준비를 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한편, 입헌군주제를 위해 참정원에 군주입헌 헌법기초위원을 추천하라 하여 양탁 10명을 헌법기초위원회에 임명했다. 12월 15일에는 부총통 [[리위안훙]]을 무의친왕에 책봉하고 12월 19일 등극대전주비처를 조직하였는데 이미 지난 9월부터 준비해온 것으로 위안스카이의 사양이 말 그대로 가식임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즉위 예산으로 590만원을 책정하여 성대한 즉위식을 준비했다.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이 표방한 만주족, 몽골족, 회족, 장족에 대한 대우 조건이 유효하다고 천명했으며 나이 많고 덕망 높은 인물들에겐 자신에게 신하로 칭하지 않아도 된다고 발표, 경친왕 [[아이신기오로 이쾅]], [[순친왕]], [[리위안훙]], 세속, 나동, 주복을 '옛 동료'로 [[쉬스창]], 장건, 조이손, [[리징시]]를 '옛 친구'로 선정하여 언제든지 황제를 접견할 수 있고 황제에게 무릎꿇고 인사할 필요가 없는 특권을 주었다. 12월 21일에는 [[장쉰]], [[펑궈장]], [[니쓰충]], 강계제 등 6명을 1등 공작에, [[탕지야오]], [[옌시산]], [[리춘]], [[자오티]] 등 9명을 1등 후작에, [[진윈펑]], [[차오쿤]] 등 12명을 1등 백작에, [[리허우지]] 등 4명을 1등 자작에, 16명을 1등 남작에 봉했고 12월 23일 [[장쭤린]] 등 3명을 2등 자작에, 9명을 2등 남작에, 7명을 3등 남작에 봉했다. 12월 31일에는 연호를 제정하여 1916년을 홍헌원년으로 선포했다. 1월 10일에 외몽골도 홍헌 연호를 사용하겠다고 알려왔다.[* 하지만 1월 3일에 대외적으로는 민국 연호를 사용하게 하여 외국에서는 황제인지 총통인지 모르겠다면서 황제 총통이라고 빈정댔다.] 위안스카이는 1월 1일에는 총통부를 신화궁으로 개칭하고 1월 5일 전국에 제제의 이로움을 선전하는 한편 2월 21일에 [[우페이푸]] 등 2명을 3등 남작에 봉했다. ||[[파일:기념주화.jpg]]|| || 중화제국 기념주화[* 동아시아의 용과는 다른, 서구의 [[드래곤]]이 중국에 소개된 영향인지는 모르나, 동아시아 스타일의 용이 박쥐 날개를 달고 있는 해괴한(...) 형상이 나타나 있다.] || || [[파일:2007224122237990.jpg]] || || 중화제국지새와 황제지보의 인문 || 위안스카이는 즉위를 위해 그야말로 물을 쓰듯이 돈을 썼는데 즉위식을 위한 590만원을 포함해서 심복들을 위한 하사금, 각종 작전비로 1천만원을 소요했고 궁궐 개축비용으로 470만원을 썼으며 45만 달러를 소요하여 용의 조각과 자수가 새겨진 호화로운 옥좌를 만들고 9폭 병풍과 부채를 걸었다. 그리고 베이징의 가장 큰 복장점 서부상에서 용포를 특별 주문하였는데 50만원 짜리 제사용 용포와 20만원 짜리 즉위용 용포로, 용포 제작비용만 70만원이었다. 또한 여론 매수를 위해 쓴 돈이 30만원, 심복들에게 지급한 작전비가 300만원이었다. 위안스카이의 얼굴을 새긴 화폐도 준비되었으며 중화제국지새, 황제지보라는 [[옥새]]를 새로 만들었다. 보옥으로 만들어진 이 인장에는 <나면서부터 천명을 받들었으며 황제의 지위가 천지와 더불어 다함이 없다>라는 뜻의 <誕膺天命 歷祚無彊> 여덟글자가 새겨졌다. 위안스카이가 즉위를 위해 쓴 돈은 총 6천만원에 이르렀고 이는 재정파탄을 일으켜 위안스카이의 목을 죄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