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헌제제 (문단 편집) == 결과 == 즉위는 1916년 1월 1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위안스카이가 옥좌에 오르기도 전에 1915년 12월 25일 [[차이어]], [[량치차오]], [[탕지야오]], [[리례쥔]]이 호국군의 거병을 알리고 [[호국전쟁]]을 일으키면서 중화제국은 시작도 하기 전에 반란에 직면했다. 이어 전국 각지에서 즉위를 촉구하며 아부하던 장군들도 호국군의 기세에 군주제 반대 통전을 보내며 급기야 독립을 선포하니 위안스카이는 1916년 3월 23일 제제를 취소하고 6월 6일 사망하면서 위안스카이의 황제 놀이는 1916년을 기준으로 겨우 83일, 그 전해인 12월 12일을 기준으로 한다 하더라도 겨우 백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자세한 것은 [[호국전쟁]] 문서 참조. 호국전쟁 이후에도 [[호법전쟁]], [[안직전쟁]], [[1차 직봉전쟁]], [[2차 직봉전쟁]], [[손봉전쟁]], [[직봉풍전쟁]]이 일어나는 등 중화민국은 춘추전국시대에 돌입하여 [[장제스]][* 호국전쟁까지는 세력이 미미했던 장제스는 호법전쟁때 부터 활약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국민당 세력의 주요 지도자 중 하나로 떠오른다. 결국 내부의 반대파들을 누르고, 외부의 군벌들을 격파하고 중국 대륙의 패권을 쥐게 된다.]가 [[국민당의 1차 북벌|북]][[국민당의 2차 북벌|벌]]로 천하를 통일하기 전까지 분열되었다. 이때 정신 못차리고 황태자가 되려고 설치던 위안커딩은 나중에 정신을 차렸는지 학자의 길을 걸으며 [[중일전쟁]] 때 [[일본 제국]]의 회유를 거절하고 [[국공내전]] 이후에도 살아남는다. 위안스카이의 제제는, 입헌군주제 표방, 나름의 민의 중시 명분, 궁녀 간택을 비롯한 일부 구습 폐지를 천명하여 무턱대고 과거로 돌아가는 행각이라고까진 볼 수 없었으나 이미 종신총통제를 실시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틀어쥔 상태에서 일부 측근들의 부추김에 여론과 반대세력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무모하게 강행한 반동적 행각임은 틀림없었다. 결국 량치차오를 비롯하여 위안스카이에게 협조하던 혁명세력들을 등돌리게 하고 쑨원 등은 그야말로 불구대천의 원수로 만들어 그의 체제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대가는 위안스카이 자신의 목숨과 중국의 대혼란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