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현우 (문단 편집) === [[LG 트윈스]] 시절 === [[파일:external/pds19.egloos.com/b0040181_4c611c6cba1b2.jpg]] 2000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었고, 당시 자금난에 시달리며 인수 기업을 찾던 [[해태 타이거즈]]는 거액을 들여 홍현우를 잔류시킬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협상이 결렬되어 시장으로 나오게 된다. 이후 [[LG 트윈스]], [[SK 와이번스]], [[삼성 라이온즈]][* 이 중 삼성은 홍현우와 계약 조건 중 매년 타율 0.350, 30홈런 이상이라는 빡센 옵션 조건을 걸었는데 정황상 홍현우의 몸 상태를 어느 정도 인지한 상태에서 저런 조건을 제시했다.] 등이 FA 시장에 나온 홍현우를 영입하기 위해 경쟁을 펼쳤고, 결국 4년 총 18억의 거액을[* 물론 A+급 선수가 100억을 심심찮게 넘기는 지금 기준으로는 거액이라고 하면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때는 FA 선수들의 몸값이 훅 뛰기 한참 전이었다.] 받고서 [[LG 트윈스]]로 이적한다.[* 같은 해 FA 자격을 얻어 똑같이 4년 18억에 삼성에 잔류한 [[김기태(1969)|김기태]]와 더불어 FA 최고액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1년 후 삼성에 복귀한 [[양준혁]]이 27억으로 경신한다.] 해태에서는 FA 보상 선수로 [[최익성]]을 받았다.[* 결국은 보상선수인 최익성보다도 일천한 성적을 남겼다. 최익성은 그럭저럭 대타로서는 쓸만한 성적이라도 남겼다.] 그런데 '''그는 먹튀의 아이콘이 되고 말았다.''' LG에서 그의 성적은 처참할 정도였는데, 통산타율 .290을 왔다갔다하던 타격은 [[2003년]](.238)을 제외하고 '''2할을 넘겨본 적이 없으며''' 4년 동안 221게임에만 출장하며 홈런은 '''14개''', 도루는 '''2개'''를 기록하는 등 진정한 추락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렇게 추락한 원인은 FA를 앞두고 무리하게 파워를 끌어 올리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미친듯이 했는데, 그것이 무릎부상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흔히들 LG 이적 후 부상이 찾아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부상은 FA 직전 시즌인 2000 시즌에 당했다. 그리고 그 시즌에 커리어 로우급의 성적을 거두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FA 직전 시즌에 무릎부상으로 한 시즌의 성적이 바닥을 쳤으면 가치가 하락해야 정상인데 1999년에 보여준 퍼포먼스가 워낙 뛰어났고 고졸 데뷔라서 나이도 젊은 편이라 회복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LG가 저렇게 지른 것이다. 2000년 시즌 시작 전 로마이어의 슬라이딩으로 인한 발목부상이 있어도 FA인데다가 팀 사정상 뛰느라 발목도 좋지 않았다. 물론 당시에도 무릎부상을 우려하는 의견은 있었지만 그냥 묻혔다. 또 발목부상을 초래한 당시의 주자 로마이어와 한 팀이 된 것도 굉장히 미묘했다고 본인도 나중에 술회했다.] 참고로 홍현우가 LG시절에 친 안타를 돈으로 환산하면 안타 1개에 약 '''1,117만원''', 홈런 1개에 '''1억 5,714만원'''[* 웬만한 선수의 '''연봉''' 수준이다!], 그리고 도루 1개에 '''9억원'''을 투자한 셈이라고 한다. 거기다 준주전으로 뛴 2003년을 제외하면 거의 매 시즌 부상 및 2군으로 허송세월을 보냈다. 사실, [[박동희(기자)|박동희]]의 인터뷰에 따르면 금액은 SK가 LG보다 더 많이 제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서울이라는 큰 무대에서 놀고 싶다는 마음에 LG와 계약했는데, 자신은 이것을 나중에 후회했다고 한다. [[잠실 야구장]]이 워낙 넓다 보니 해태시절에는 타격 슬럼프에 빠져도 홈런 한방 치면 금세 회복이 되었는데, 잠실에서는 바로 펜스 앞에서 잡혔던 타구가 유독 많아서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이거 때문에 홍현우의 사례는 둘째치고, LG는 '''우타거포 육성 실패'''라는 참담한 결과를 [[박병호]]와 [[정의윤]]을 통해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컨택형을 거포형보다 중시하게 된 것이다. 당장 LG 타자들의 대표격인 [[박용택]]도 타팀이었으면 300홈런은 무난히 넘기고 이 외에도 [[문보경]], [[오지환]], [[유강남]], [[채은성]], [[이형종]], [[이병규(1983)|작뱅]] 등 중장거리형 타자로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선수들이 거포로 클 수 있었다는 아쉬움을 남기는 것을 보면 그냥 LG라는 팀 자체가 거포와는 인연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잠실이라는 홈구장을 핑계삼자니 같은 홈을 쓰는 OB-두산 베어스가 홈런왕을 숱하게 배출한 걸 생각하면 핑계도 안된다.) 실제 LG에서 한 시즌에 30홈런 이상을 기록했던 타자는 이병규와 로베르토 라모스 둘 뿐이며 이 둘은 모두 좌타자였다. 우타자로서 2000시즌에 35홈런을 기록한 찰스 스미스가 있지만 이는 삼성에서 뛰다가 시즌 중간에 LG로 이적한거라 실질적으로 LG 유니폼을 입고 친 홈런은 15개다. 그리고 구단 내 최다 홈런갯수가 로베르토 라모스의 38개인지라 40홈런 이상을 기록한 타자는 단 한 명도 없는데 이는 역대 프로야구 구단들 중 쌍방울과 함께 유이한 사례이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구단들 중에선 유일하다.(21세기 창단 구단들인 SK-SSG, 키움, NC, kt도 각각 호세 페르난데스, 한유섬, 제이미 로맥(이상 SK), 박병호, 강정호(이상 키움), 에릭 테임즈, 멜 로하스 주니어라는 40홈런+ 타자를 배출했으며 심지어 해체된 삼청태현도 심정수와 박경완이라는 40홈런+ 타자를 배출했다.)] 물론 위에서 언급했듯 이미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지만, 계약 당시 가장 작은 구장 중 하나인 도원구장을 사용한 SK와 계약했다면 그의 성적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홍현우도 2000년 시범경기 중 땅볼타구를 처리하다 [[댄 로마이어]]와[* 아이러니하게도 홍현우가 LG 유니폼을 입게 된 2001년부터 로마이어도 한화를 떠나 LG로 오면서 같은 팀 소속이 되었다.] 충돌하는 바람에 이미 무릎에 부상을 얻은 상황이었고, 그 부상을 달고 2000년 시즌을 뛰었기 때문에 당시 LG가 FA 계약을 할 때부터 홍현우의 무릎 상태에 의구심이 든다는 의견도 있었다. 실제로 이 무릎 부상 이후 두 번 다시 반등하지 못한걸 보면 어느 구장을 갔더라도 1999년까지의 퍼포먼스는 두 번 다시 보여주지 못했을 거라는 냉정한 평가도 있다.[* 과거 해태 시절 팀 선배이자 당시 [[LG 트윈스]]의 코치로 재직 중이던 [[이순철]]의 증언에 의하면 이미 LG와 계약했을 당시부터 무릎 상태가 좋지 않아 제대로 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고 한다. [[http://www.baseballpark.co.kr/bbs/board.php?bo_table=kbo&wr_id=8348|출처]]] 생각보다도 훨씬 더 심한 홍현우의 부진에, 당시 LG 팬들은 분노와 조롱을 넘어 그의 플레이 자체를 일종의 밈으로 만들어 자학개그를 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야갤]]로 대표되는 집단적인 온라인상 막말, 조롱, 개드립 문화가 없었던 시절이다.] 홍현우를 '''그 분'''으로 부르고, 당시 홍현우의 [[스킨헤드]] 헤어스타일을 불교 승려에 빗대어 삼진이나 병살을 당하면 "그 분의 대자대비함"이라고 비꼬았으며, 어쩌다가 안타라도 치는 날에는 미륵의 법력이 제대로 통했다며 역시 모셔오길 잘 했다는 글이 올라오는 식이었다. 특히 2003년 이후 LG는 이광환 2기 - 이순철 감독체제 하에서 성적도 신통찮았고 팀 분위기가 어수선했기 때문에, 홍현우의 부진은 팀에게도 팬들에게도 치명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