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교/대한민국 (문단 편집) === 한국전쟁과 1950~1980년대 === 1950년 한국에서 전쟁이 터지면서 북부에 살던 화교들 중 약 1만명이 중국으로 가거나 한국으로 월남한다. 장제스는 국공내전 직후인지라 다시 중화민국군을 투입하는 방안을 미국에 제안하지만 확전을 원치 않던 미국은 거절한다. 대신 국내 거주 화교들을 모아서 [[SC지대]]를 창설한 다음에 [[중국인민지원군]]을 상대로 한 정보공작과 [[심리전]], 통역업무 등에 투입하였다. 그외에 일부는 자원하여 실제 전선에 나갔다고 하는데 반공화교들로 추정된다. 당시 화교들은 전국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많이 갔는데 군복을 입고 휴가 나온 화교들이 자주 임시 화교학교에 나타났다고 한다. 이들 중 일부는 나중에 대만으로 건너가서 [[중화민국군]]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 화교 중에 대만의 [[사관학교]]에 가 대만군이 된 사람도 꽤 있다고 한다. 예전에 화교들은 대만에 들어가 몇 개월 이상 있으면 대만군에 입대해야 했다. 현재는 [[모병제]]가 도입되어 그럴 필요는 없지만. 국제 사회에서 중화민국의 대표성을 세우고 싶었던 [[장제스]]는 해외의 화교들에게 이를 얻기 위해 한국 화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한국 화교들은 대만 입시에서 꽤 혜택을 받은 편이었고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대만의 중고등학교로 올 수 있게 여러 지원책을 마련한 게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는 편이었다. 심지어는 군함을 동원해 화교들이 대만에 와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지원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도 대만과의 협조를 위해 [[중공군]] 중 4천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해 대만으로 보내기도 했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화교들은 사실상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던 상업을 포기하고 [[요식업]]에 주력한다.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 1950년 창고봉쇄령과 화폐개혁, 그리고 1962년의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 등으로 인해 화농이 몰락하고 화상들도 헐값에 땅을 팔게 된 것이 그 이유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이승만이 화교의 놀라운 상권 장악력을 목격하고 막으려 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이런 강력한 화교 견제 정책은 이후 정권들이 계승해서 199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당시에는 화교를 포함한 외국계 출신들은 다 차별받아서 민족주의를 위해 실행한 정책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수 있다. 오히려 화교들은 다른 힘없는 외국계에 비해 특혜도 어느정도 받았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화교 요식업자들은 피로연 같은 큰 행사를 많이 했는데 토지 소유 제한으로 대규모 영업장의 운영이 불가능해진다. 운이 좋은 경우엔 한국인 바지사장을 내걸기도 한다. [[박정희]] 정권에 들어와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으며, 국내공산업 발전을 위한 국산품 애용, 국민의식 고취 노력이 더 강해지며 외국계 억제 정책은 계속되었다. 1970년엔 주거용 200평, 영업용 50평으로 약간 제한이 풀리긴 하지만 영세한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었고 이러한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은 [[외환위기]] 이후에 풀리게 된다. 1970년엔 단 몇 개월 뿐이긴 하지만 중식당의 쌀밥 판매 금지 조치가 내려진 적도 있다. 이는 [[혼분식 장려 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는데 사실 타 식당도 혼분식 정책으로 애로사항이 꽃피기는 마찬가지였다지만[* 이 당시 혼분식 정책을 박정희 정권이 얼마나 강압적으로 저질렀냐면 혼분식 단속원이 식당 사장딸이 먹는 밥이 흰쌀밥인 것을 가지고 트집잡아서 영업정지 처분을 내린 일이 있었을 지경이었다. 다행히도 소송에서 승소했다고.] 화교들에게 상당히 심리적으로 위축될 만한 일이었다. 그탓에 4천 곳에 달하던 화교 식당은 1천 곳으로 줄어들었다. 대신 미국에 한국 화교들의 식당이 2천 곳이나 생겼다. 다만 당시 한국과 중화민국은 서로 상당히 우호적인 편이었다. 아무래도 당시 반공이 실질적인 국시였던 한국과 대만이 정치적으로 밀월 관계였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대만이 한국보다 더 잘 살았기 때문에 모범적인 경제발전 모델로 칭송하던 때였기도 했다. 1964년 프랑스, 1972년에 일본, 1979년에 미국이 차례로 중화민국과 단교한데 비해 한국은 1992년까지 수교를 유지했다. 화교를 경제적으로는 탄압했지만, 병역 면제에 대학 입학시에 정원 외 입학까지 시켜 주는 등의 특혜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 또한 1980년대부터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중국 본토과의 수교가 가시화되면서 중국 대사관이 있던 소공동 쪽에 주로 거주하던 화교들이 본토와의 연결이 상대적으로 편한 연남동 등지[* 한성화교학교가 있던 곳. 화교 출신 배우 [[하희라]]도 그 지역에서 자랐다.] 로 이주하기도 했다. 한국 화교는 1970년대 최대 8만에 이르렀다. 전쟁 이후에는 베이비 붐과 월남자 등으로 인한 자연증가. 근데 수치에 따라 12만까지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국내산업보호를 위한 외국인에 대한 제한조치도 있었고 당시에 대만이 한국보다 많이 잘살았기 때문에[* 당시 한국 정부나 한국 언론에서 대만을 모범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한 나라로 소개했던 시절이었고, 국민들 생활수준도 한국보다 많이 앞서있었다. 구체적으로 예시를 들자면 컬러TV는 대만이 1970년대에 보급되었는데 한국은 1980년대에 보급되었다든가 자가용 대중화도 한국이 198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는데 대만은 이보다 5년 정도 일찍 시작되었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여행자유화 조치도 대만은 1979년, 한국은 1989년에 시행되었다. 즉, 당대에는 대만이 한국보다 10년 일찍 더 잘살았다는 얘기다. 경제지표면에서 있어서도 대만이 한국보다 앞서기는 매한가지였다. 물론 2000년대에 대만의 봉급수준이 정체되고 한국보다 임금수준이 많이 떨어지면서 이는 희석되었다. 공공물가나 식료품과 생필품 가격, 외식비는 대만이 한국보다 훨씬 싸다고는 하지만 부동산 가격이나 전월세비를 감안하면 물가 차이가 그렇게 심하게 나는 것도 아니다.] 화교들 입장에서 군대문제 정도를 빼면 한국을 떠나도 아쉬울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기에 [[대만]], [[홍콩]], [[싱가포르]]같은 중화권국가나 북미로 상당수가 이주하여 1990년에 2만명까지 줄어들게 된다. 물론 대만이 잘살았다고 해도 문화적 차이는 엄연히 있기 때문에 대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거나 실패한다는 이유로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꽤 있다. 또한 토지 소유 제한 등으로 화교들은 전문직 등으로 진출하게 되고 대만이 한국보다 잘살았던 시절인 만큼 한국에서 대학 입학 등에서 괜찮은 편이었다. 화교들은 의대, 한의대 등 알짜배기 학과에 입학할때 특별 전형을 통해 들어온다. 이 때문에 해당 직종 종사자들도 화교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심지어 세계 어느 나라에서 외국인한테 알아서 만렙 채워주냐고 까는 사람들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