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염방사기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 ===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 국방군]]은 [[에반-에마엘 요새]] 함락을 필두로 요새나 [[벙커]], 시가전에서 적들을 소탕하는데 화염방사기를 잘 활용했다. 동부전선에서도 [[빨치산]] 소탕에는 이만한 병기가 없었거니와 [[우라돌격]] 방어에도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기에 [[지뢰]]식 무인 화염방사기까지 개발하여 이용했다. 한편 영국은 [[바다사자 작전|독일군의 본토 상륙]]에 대비해서 해안선에 송유관과 화염방사기를 도배하기도 했다. 전쟁 기간 동안 독일군은 2인용 화염방사기를 만들기도 했고, 심지어 1회용 화염방사기인 [[https://en.wikipedia.org/wiki/Einstossflammenwerfer_46|Einstossflammenwerfer 46]]을 만들기까지 했다! 0.5초밖에 화염을 발사하지 못한다는 약점은 있지만, 3.6kg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무게와 저렴한 가격, 60cm밖에 안 되는 길이로 인해 상당히 편리한 무기였다고 한다. 당장 여러 번 쓸 수 있는 독일군의 주력 화염방사기인 [[플라멘베르퍼 41|Flammenwerfer 41]]은 연료를 가득 채울 경우 21.3kg이며, 구식 화염방사기인 [[플라멘베르퍼 35|Flammenwerfer 35]]는 35.8kg이다. 이런 화염방사기는 여러 번 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사정거리는 어차피 25m~30m로 다들 비슷하고 '''무게가 눈물 나게 무겁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ww2incolor.com/churchill_mk_7_crocodile.sized.jpg|width=100%]]}}} || || 제2차 세계 대전 중 최고의 화염방사전차인 영국의 크로커다일 || 그리고 2차 대전 중, [[이탈리아 왕국군|이탈리아군]]과 [[독일 국방군|독일군]], [[영국군]], [[소련군]], [[미군]]은 모두 장갑차나 [[퍼니 전차#s-4.6|전차에 화염방사기를 장착]]하는 시도를 했다. 위의 [[처칠 전차|처칠 크로커다일]]이 대표적. 크로커다일의 경우에는 적군 전차 입장에도 퍽 부담스럽고 보병입장에선 정말 답이 없는 [[떡장갑]]에다, 연료탱크가 외부에 있고 대용량 트레일러로 운반하기 때문에 타국의 화염방사전차보다 불을 더욱 오래 뿜는다. 연료가 모자란다 싶으면 호스를 떼고 예비 연료탱크로 교체하면 되고, 연료탱크가 피탄당해 손상되었으면 연료탱크를 떼버리고 튀면 해결되기 때문에 유폭위험도 적었다. 이탈리아도 [[L3]] 탱켓에 연료용 수레를 다는 식으로 개조하여 운용하였고 독일군, 소련군, 미군은 각각 [[3호 전차|3호 화염방사전차]], [[T-34-76|OT-34/76]], [[M4 셔먼|M4A2 지포라이터]]를 만들었는데 이들은 화염방사용 연료 탱크를 차체에 내장하거나 최소한 붙이고 있는 형태였다. [[태평양 전쟁]]에서는 [[미군]]에 의해 M1, M1A1, [[M2 화염방사기]]등 화염방사기들이 대량으로 사용되었다. [[일본군]]도 화염방사기인 소화염발사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석유]] 부족으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굳이 석유 문제가 아니더라도 기술적 문제 자체도 심각했었는데, 일례로 [[과달카날]] 전투 당시 일본군 전사자에게서 노획한 화염방사기를 써보니 성능도 신통찮았다고 한다. 또한 [[중일전쟁]] 때만 해도 자국군의 각종 화염방사기를 개발하고 배치했지만 수세의 상태에서 싸웠던 태평양 전선에서는 화염방사기의 효율이 떨어졌기에 잘 쓰이지 못했다. 방어전에서는 자신의 위치를 쉽게 노출 시키는등 단점이 많고 소중한 기름을 쓰는 화염방사기보다는 기관총과 저격이 더 유용하다. 미군의 경우 정글전에서 유효한 병기라 판단, 1943년에 M1 화염방사기를 제식 채용하였다. 타국보다 도입이 늦은 셈. 그러나 [[쇼미더머니]] 천조국답게 순식간에 엄청난 양을 제작해 사용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첫 실전 투입되었다. 특히 [[반자이 돌격]]을 제압할 때나 역으로 제대로 된 지원을 받으며 총검 돌격을 실행할 때, [[펠렐리우 전투]], [[이오지마 전투]], [[오키나와 전투]] 등에서 [[동굴]], [[참호]] 등에 [[매복]]한 일본군을 제압하는 데 최고의 효율을 발휘했다. 이당시 섬에 땅굴을 파고 농성전을 벌이던 일본군 동굴의 입구에 화염방사전차나 공병의 화염방사기를 퍼부어 화염+매연으로 땅굴내 일본군을 무력화시킨뒤 입구를 폭파해 땅굴 입구를 막아 일본군을 가둬 제거하는 방식의 전투를 블로우토치 & 코크스크류(Blow Torch & Cockscrew) 전술이라고 한다. 앞서 언급된 전투들이 하나같이 거센 일본군의 저항에 해병대가 큰 인명피해를 본 작전이다보니 인명피해를 줄이고 안전하게 가겠다고 채택한 전술인데, 이때문에 진격 속도가 느려져서 전투가 장기화 되었다는 비판의 여지도 크다.[* 같은 시기의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이와 반대로 [[일본 본토 공습]] 당시 다소 피해를 입더라도 저공 소이탄 폭격으로 폭격의 위력을 높혀 빠르게 전쟁을 끝내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로 인한 인명피해로 일선 파일럿들에게 비난받기도 했다. 둘다 장단이 있는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