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장실 (문단 편집) == 역사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X0Xr6sa8UZs)]}}}|| || 화장실의 역사 || 비료기술이 발전하기 전까지 대소변은 중요한 세제이자 연료이자 대체 비료였다. 기원전 2,500년경 [[인더스 문명]]에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인 [[모헨조다로]]에 화장실이 있었다. [[https://www.hankyung.com/opinion/article/2017092719421|기사]],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16819350&memberNo=36678582|링크]], [[https://blog.naver.com/mr_pung/40199949430|링크 2]] [[고대 그리스]]에서는 대소변을 하수도로 따로 흘려보내 [[노예]]들이 퍼서 비료로 썼다. 납작한 돌이나 점토조각으로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050311/8168146/1|뒤처리]]를 했다. 다만 이 시절 [[변기]]는 그냥 돌에 구멍을 뚫는 수준이라 당연히 [[볼기|엉덩이]]가 차가워서 노예가 미리 앉아 따뜻하게 만들거나 따뜻한 [[물]]을 적신 천을 깔기도 했다. [[고대 로마]]에서도 마찬가지로 돌로 만든 좌변기에 수도를 끌어온 수세식 변기가 있었다. 물론 이 정도면 시설이 매우 좋은 경우였다. 역시 [[공중화장실|공동 화장실]]이 있었다. [[고대 로마|로마]]에서는 [[해면]]으로 만든 스펀지가 달린 막대로 뒤를 닦았다. 물에 씻어서 닦고 다시 물에 씻고 변이 쓸려가는 수도관 외에 다른 물줄기가 있어서 여기에 헹궈냈다. 물에 씻은 스펀지는 소금과 식초를 탄 물에 담가서 소독하였다. 이런 [[공중화장실]]은 하인들이 주로 쓰던 곳이고, 귀족도 쓰긴 했지만[* [[http://www.christiantoday.us/25592|1인용 화장실]]을 주로 썼다.] 긴 옷으로 프라이버시를 지켰다.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7/02/2016070200354.html|기사]]. 참고로 이때 당시 공중화장실은 귀족용과 평민용같이 신분에 따라서는 나뉘어있었으나 남녀를 구분해놓지는 않아 남녀가 공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 중요한 화장실 매너 중 하나가 자기가 쓴 걸 씻어두는 것이었다고. 간혹 [[공중화장실|공공 화장실]]에 상주하며 방문객들을 위해 이 막대로 뒤를 닦아주는 노예도 있었는데, 정부운영 혹은 지역 유지가 사회 기부 활동 삼아서 자기 집 노예를 보내둔 거라고 한다. [[스파르타쿠스(드라마)|스파르타쿠스]]에서도 바티아투스가 용변을 보고 일어서자 곁에 서 있던 노예가 막대로 뒤를 닦아주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바티아투스는 자신의 뒤를 닦아준 노예에게 동전을 던져준다. 4세기 로마 중심지에만 400여 개의 공중화장실이 있었다.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050311/8168146/1|기사]]. [[로마 제국]] 시절 유대땅의 [[유대인]]들은 이 로마식 화장실을 쓸 수 없었다. [[http://www.christiantoday.us/25592|기사]]. 또한 [[이끼]]나 [[잎|잎사귀]], 도자기 조각, 천 조각으로 [[https://www.history.com/news/toilet-paper-hygiene-ancient-rome-china|뒤처리]]를 했다. 고대 [[중국]]에서는 [[돼지우리]] 위에 화장실을 설치했다. [[https://historyofyesterday.com/the-astonishing-evolution-of-toilets-c5bbb482d82d|링크]]. 이는 한국의 [[제주도]]와 [[일본]]의 [[오키나와]]에도 퍼져서 화장실 밑에 돼지우리를 조성하여 [[돼지]]에게 사람의 [[똥|대변]], 남은 음식, 삶은 쌀겨, 술지게미를 먹여 키웠다. [[https://islandstudiesjournal.org/files/ISJLeeHyunPorkSustainabilityOkinawaJeju.pdf|출처]], [[https://oki-park.jp.c.ms.hp.transer.com/sp/kaiyohaku/en/inst/80/83|링크]]. [[https://islandstudiesjournal.org/files/ISJLeeHyunPorkSustainabilityOkinawaJeju.pdf|출처]], [[https://oki-park.jp.c.ms.hp.transer.com/sp/kaiyohaku/en/inst/80/83|링크]]. 물론 이것은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고, 오늘날 흑돼지들은 과거에 비해 평범하고 위생적으로 키워진다. 오늘날 제주도와 오키나와 두 곳 모두 돼지고기로 유명하다. [[인도]]의 [[고아(인도)|고아]] 주에서도 해당 화장실이 있다. [[https://www.totseans.com/bbs/discussion/14119/pig-toilet|링크]] 과거 [[중국]]에서는 나무조각으로 [[https://www.history.com/news/toilet-paper-hygiene-ancient-rome-china|뒤처리]]를 했으며, 대나무 또는 다른 나무로 만든 나무 막대기는 주걱과 비슷한 모양이고 끝부분이 천으로 싸여있었다. 이는 한국에도 넘어와 [[백제]]의 [[왕궁리 유적]]의 [[공중화장실|공동 화장실]]에서는 목간 같은 나무조각으로 뒤처리를 했다는 게 발견되었다. 6세기 [[중국]]에서 [[종이]]로 [[https://www.history.com/news/toilet-paper-hygiene-ancient-rome-china|뒤처리]]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근대 이전 [[중국]]의 고위층일수록 법도가 엄격해서 [[재래식 화장실|(푸세식) 화장실]]은 단지 남자들만 쓸 수 있었다. 여자가 화장실을 쓰면 풍기를 해친다고 여겼다. 그래서 대관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았지만, 동북쪽 귀퉁이에 작은 화장실이 하나 있었을 뿐이었다. 여자들은 절대로 화장실에 가지 않은 대신 나무나 함석으로 만든, 마통(馬桶)이라는 [[요강]]에 눴다. 집안에서 놀다가 힘들고 방으로 가서 마통을 찾기 귀찮으면, 집에 심은 꽃이나 나무 덤불 속에서 대소변을 해결한 후 끝내고 나면 하인을 시켜서 청소하게 했다. 하지만 요강에 [[똥|대변]]을 보면 냄새가 나기 마련이라서, 마통 위에 덮개를 놓았으나 덮개를 놓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이 마통은 여자들이 쓰는 침대의 구석마다 들어섰다. 청나라 때 나온 소설인 홍루몽에서 설보채의 형무원, 임대옥의 소상관은 침실의 한쪽 구석에 한 두개의 냄새나는 마통을 놓아두었다. 그런데 이 마통에서 나는 [[똥냄새]]가 무척 역겨워서, 여자들은 시녀로 하여금 향에 불을 붙이게 하고, 천으로 된 가림막을 설치했다. 1930년대가 되어서야 여자 화장실이 만들어졌는데 여전히 과거처럼 성별 구분 없이 사용 하는 경우가 있어 여자 화장실에 있는 남자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https://blog.naver.com/shanghaicrab/20198668819|링크]] [[일본]]의 경우에는 아키타 성내의 수세식 화장실 유적 등 고대로부터 화장실 문화가 예상 외로 꽤 발달했다. 막부시대부터 상류층의 화장실은 실내에 별도로 만들어진 다다미방에 있었으며, 이 때문에 나무로 만든 [[변기]]가 발달하였다. 일본의 현대식 주택을 가도 화장실은 [[욕실]]과 분리되어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고, 바닥에 [[타일]]이 아닌 장판을 깔아놓은 경우가 많은 것도 이러한 분위기 때문. 건식이라 전자식 [[비데]]가 크게 발달해 있다. [[중세]] 유럽에서는 한 화장실에서 여러 사람이 마주 보거나 부대끼며 큰 일을 보았다. [[미국]]과 [[중국]]에 가면 시골 쪽엔 그런 화장실이 있다. 시골만 있는 것이 아니라 뉴욕과 베이징의 어느 후진 숙박업소에도 있었으며 수세식 화장실이 없는 대신 [[https://dpg.danawa.com/bbs/view?boardSeq=175&listSeq=4821679|구멍이 뚫린 돌]]이나 [[https://allthatsinteresting.com/groom-of-the-stool|천 위에 쿠션]]을 덮은 [[https://www.worldhistory.org/article/1239/toilets-in-a-medieval-castle/|나무 판자]]가 [[변기]] 역할을 했다. 중세 시기에는 [[세균]]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나쁜 냄새가 질병을 일으킨다고 믿었기 때문에 화장실은 [[성(건축)|성]]에 [[https://www.fmkorea.com/3284450156|외벽이 돌출된 형태]]로 보이며, [[똥|변]]은 벽 바깥에 있는 구덩이(latrine)나 [[http://xn--vb0b568bw9aq8u83f.com/board//bbs/board.php?bo_table=question_190207&wr_id=1115&sfl=&stx=&sst=wr_hit&sod=asc&sop=and&page=8|땅]]이나 [[해자]]([[https://allthatsinteresting.com/medieval-toilet|garderobe]], [[https://castletourist.com/what-is-inside-a-medieval-castle/|링크]])에 떨어졌다. 해자에 떨어진 변은 물고기들이 먹긴 했지만 물에 인과 질소와 같은 게 과잉 공급되기 때문에 부영양화가 되어 호기성 박테리아가 증식해 물이 흐려지고 수질이 나빠진다. [[http://glob.egloos.com/4250219|링크]],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100007/2004/02/005100007200402040017364.html|기사]]([[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43785|네이버 뉴스]]). 중세 성내 생활의 특성상 이 해자 물이라는 게 흐르는 자연 물길을 이용하도록 설계된 경우를 제외한 [[고인물]]이라면 대부분 상상도 못할 똥물일 경우가 많아 빠지면 [[똥독]]이 올라 죽을 가능성도 높았다. 실제로 중세 유럽에서는 성 안의 [[화장실]]에서 배설물을 벽을 통해 쓸어내서 그냥 해자에다가 흘려버렸으므로 진짜 똥물이 맞았다. 사실 해자 물을 더럽게 만드는 건 어느 정도는 의도적인 면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시커멓게 오염된 물은 그 자체로도 공격자가 심리적으로 접근을 꺼리게 할 수 있으며 빠진 적병들에게 각종 질병을 유발함으로써 실질적인 전투력 저하는 물론 냄새와 시각적 효과 등으로 사기 저하까지도 노릴 수 있었다. 전쟁이 계속되면 전사자의 시체까지 들어가서 시체 썩은 물로 업그레이드되기도 했다. 현대엔 항생제를 이용해 세균 감염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지만 중세엔 상처 감염으로 인한 염증은 순식간에 사망으로 가 버릴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https://www.newcastlecastle.co.uk/castle-blog/gong-farmer|Gong-farmer]]나 [[https://blog.naver.com/goodchoy/221551985334|Nightman]]([[https://www.nonfictionminute.org/the-nonfiction-minute/gong-farmers-their-crop-was-crap|출처]])이라고 불리는 [[똥]] 푸는 인부들은 [[똥냄새|냄새]]가 성 위로 올라오기 전에 변을 삽으로 퍼서 손수레에 싣고 가서 따로 묻거나 밭에 뿌렸다. 해당 일은 구덩이에 빠져 익사할 위험이 있고 실제로 [[https://www.cracked.com/article_32360_gong-farmers-had-the-crappiest-job-of-the-middle-ages.html|1325년]] Richard Raker가 구덩이에 빠져 익사한 적이 있었다. 또한 더러웠기 때문에 이들은 보수는 많이 받았지만 사람들이 이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영주는 [[https://www.english-heritage.org.uk/castles/life-in-a-castle/|개인 화장실]](house of easement, privy)이 따로 있을 수도 있다. [[하인]]이 [[볼기|엉덩이]]를 닦을 작은 천과 손을 씻을 물그릇과 큰 천을 제공했다. [[영국]]에선 왕의 변을 치우는 것이 최고 명문 중 명문이었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후 뒤를 닦아주는 '[[시종|청결관]]'([[https://en.wikipedia.org/wiki/Groom_of_the_Stool|Groom of the Stool]])이라는 직책[* [[https://en.wikipedia.org/wiki/Lords_and_Gentlemen_of_the_Bedchamber|Gentleman of the Bedchamber]] 중 선두이다. 왕비나 여왕에게도 [[https://en.wikipedia.org/wiki/Lady_of_the_Bedchamber|해당 직책]]을 맡는 귀족 부인들이 있다.]이 있었는데, 이 청결관은 [[공작(작위)|공작]]이나 후작 수준의 높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최고위 귀족 가주가 손수 왕의 변을 치워야 했다. [[헨리 8세]] 시기 기준 약 4명 정도가 있었다. 헨리 8세의 변을 치우던 공작은 다른 귀족들에게 질문을 받자 "뭐, 왕이 대식가라는 건 알겠더군요."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창문이 있는 곳이 잘 없었고 [[똥냄새|악취]]가 위로 올라오기 때문에 [[https://allthatsinteresting.com/medieval-toilet|허브]]를 통해 냄새를 가렸다. [[수도회|수도원]]에서도 [[https://theqoo.net/romancefantasy/2222468494|화장실]]이 있었다. 부유한 사람들만 화장실을 가질 수 있어서 [[https://www.fmkorea.com/4121888899|도시에 사는]] 서민들은 [[요강]]에다가 눈 후 길거리에 버렸다. 심지어 사고가 일어난 적도 있다. 1184년 7월 25일 [[신성 로마 제국]]의 귀족들이 튀링겐 백작 루이 3세와 마인츠 대주교 비텔스바흐의 콘라드 간의 불화를 해결하기 위하여 [[https://www.fmkorea.com/3448956099|성 피터(베드로) 교회(Peterskirche)]]의 2층에 모였다가 회의가 시작할 때 바닥의 낡은 나무 판자가 모인 사람들의 중량을 감당하지 못해 무너져버려 1층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1층 바닥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려서 지하에 있는 화장실 배수로로 떨어져 버린 대참사가 발생했다. 이 참사로 최소 60명의 귀족들이 [[똥]]물 [[똥독|속]]에서 [[익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위키백과 기준 당시 사건을 다룬 문서 이름을 [[https://ko.wikipedia.org/wiki/%EC%97%90%EB%A5%B4%ED%91%B8%EB%A5%B4%ED%8A%B8_%EB%98%A5%ED%86%B5_%EC%82%AC%EA%B3%A0|에르푸르트 똥통 사고]]라고 이름지었으며, 더 점잖은 이름으로는 [[에어푸르트|에르푸르트]] 변소 사고(참사)라고도 한다. [[하인리히 6세]]도 회의에 참석했었는데, 그는 석재 바닥에 있어서 화를 면했다. 이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고 개연성이 [[https://theqoo.net/bl/1574225067|없어서]] 그런지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umorbest&no=1638012|유머화]]되었다. 16세기 [[프랑스]]에서는 [[삼(식물)|대마]]와 통[[밀]]을 갈아 만든 밀기울, [[양(동물)|양]]털로 뒤처리를 하는 것을 선호했다.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050311/8168146/1|기사]] 18세기 [[유럽]]에서는 [[옥수수]] 속대로 [[https://www.history.com/news/toilet-paper-hygiene-ancient-rome-china|뒤처리]]를 했고 [[신문]]과 [[잡지]]로도 뒤처리를 했지만 세월이 흘러 카탈로그의 종이가 광택 용지로 바뀌자 잡지를 화장지 대용으로 쓰는 것을 중지했다. 1919년 [[미국]]의 한 잡지에는 대놓고 뒤처리용으로 쓰라고 책 한 쪽에 구멍이 뚫려있기도 했다. [[https://www.farmersalmanac.com/the-hole|링크]]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의 상류층 여성들은 오래된 [[신문]], [[잎|나뭇잎]] 또는 [[옥수수]] 속대로 [[https://nypost.com/2016/10/23/the-beauty-routine-of-a-victorian-woman-was-anything-but-glamorous/|뒤처리]]를 했다. 1857년 [[미국]]의 조셉 가예티가 알로에 함유 마닐라[[삼(식물)|삼]]으로 만든 의료용 [[휴지|화장지]]를 처음으로 출시했지만 당시 사람들이 뒤처리용으로 쓴 [[잡지|카탈로그]]는 한 백화점에서 무료로 각 가정에 보냈기 때문에 보급에는 실패했다. [[https://www.wassada.com/bbs_detail.php?bbs_num=429483&tb=board_freetalk&id=&num=&pg=|링크]], [[http://www.lemen.com/imageGayetty1.html|링크]]. 1890년에 두루마리 화장지가 나왔다. [[https://dustyoldthing.com/victorian-era-hygiene/|링크]]. [[http://www.withwta.org/home/|세계화장실협회]]라 하여 이 화장실을 다루는 국제 민간단체도 있다. 이 민간 단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세계화장실협회]] 문서로. 화석연료의 고갈과 기후변화로 똥찌꺼기를 연료로 쓰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